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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r 26. 2020

‘n번방’ 세상에서 아들을 키운다는 것

[주영에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보면서

새벽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잠이 싹 달아나버렸어. 지난해 말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제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없어 외면하고 있었거든. 그래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알아야 싸울 수 있으니까. 이건 우리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거실 소파에 누워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 자세를 고쳐 잡았어. 악랄하고 끔찍한 범죄 수법도 충격적이었지만 26만이라는 숫자에 압도당했어. 텔레그램에서 패륜적인 성착취 사진과 영상을 구걸하고 공유하고 유포한 숫자. 여성을 인간이 아닌 노예로 취급한 숫자. 어쩌면 길거리에서 마주쳤을지 모를 너무나 평범한 숫자들.


새벽 6시 반쯤 됐을까. 안방 문을 덜컥 열고 날날이가 나왔어. 엄마 왜 안 자. 내 품을 파고드는 5살 아이의 보들보들한 볼살을 만지면서 생각했어. 이 아이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아이의 성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남편은 안도했어. 요즘 같은 세상에 딸 키우기는 너무 불안하다고 말이야. 내 생각은 달랐어.


여성을 한 인간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 ‘남자는 다 동물이야’‘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남성의 성적 욕망에 너무나 관대한 사회. 이런 세상에서 내 아들이 성범죄 가해자로 자라게 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인 것 같았어. 동시에 이런 세상에서 딸들이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




공중 화장실의 구멍들


여성들은 늘 두려움 속에 살아@unsplash


우리가 함께 다니던 회사가 광화문으로 이전했을 때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문 곳곳에 구멍이 정말 많이 뚫려있는 거야. 한창 불법 촬영물 이슈가 불거져 나올 때였어. 누군가 저 구멍에 설치된 초소형 카메라로 나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오싹해졌어.


더 처참한 건 그 수많은 구멍 곳곳을 막고 있는 휴지들이었어. 이 화장실을 거쳐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나처럼 불안에 떨면서 저 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았을까.


여성들은 늘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 그래도 미투 사건 이후 세상이 아주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지켜보면서 무릎이 꺾이는 것 같았어.


현실 세계에서 어떤 권력도 갖지 못했던 25살 ‘박사’가 사이버 세계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성착취 영상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고 성착취에 가담한 공범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불법 촬영 영상을 함께 보고 공유하고 유포했던, 누군가의 아들이고 오빠였고 아빠였을 남자들.


미성년자와 젊은 여성들을 거짓으로 유인해 성착취와 학대를 일삼은 것도 충격이었지만 내게 더 충격으로 다가온 건 ‘지인능욕방’이었어. 나를 아는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내 얼굴에 음란물을 합성해 모욕하고 오물을 쏟아내는 곳. ‘n번방’, ‘박사방’ 회원들이 유독 악질이었다고? 덜 나쁜 가해자와 더 나쁜 가해자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순결한 가해자는 없어. 여성의 인권을 짓밟은 이들 모두가 가해자고 공범이야.



여자이자 아들 엄마 


이런 세상에서 남자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unsplash


이제는 컴퓨터 뒤에 얼굴을 숨긴 채 누구든 클릭 몇 번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게 가능해졌어. 아무 죄책감 없이 낄낄 대면서.  여자로서 구역질이 나면서도 동시에 아들 엄마로서 걱정이 되더라. 이런 세상에서 남자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날날이는 소방차와 공룡을 좋아하고 인형도 좋아해. 매일 밤 ‘이케’라는 강아지 인형(이케아에서 사서 ‘이케’)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 다정하고 섬세하고 말도 엄청 많아.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해줘. “엄마 나 비밀 있어.” 불러서는 귓가에 “알러뷰”라고 속삭이는 애교쟁이야.


누군가는 역시 남자아이라 공룡을 좋아한다 하고, 역시 남자아이라 뛰어노는 게 다르다 하고, 또 누군가는 남자아이인데 수다쟁이라니 신기하다 하고, 남자아이인데 딸처럼 애교가 많다고 해. 나는 그런 말들이 불편해. 이 아이를 남자아이가 아닌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최대한 ‘남자아이라서, 여자아이라서’라는 말 안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놀랄 만큼 많아.


지난주 주말, 날날이를 ‘남자아이’로 보게 되는 사건이 있었어. 날날이는 4살 여자 동생이 공원에서 함께 놀았어. 어린이집에서 날날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동생이야. 잘 놀다가 갑자기 날날이가 “오빠가 알려줄게”“오빠가 해줄게”하면서 여자아이 손을 끌고 가는 거야. 물론 힘 조절이 안 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분이 이상했어. 그러고는 잘 놀다가 둘이 의견이 안 맞아서 투닥투닥하더라. 금세 또 잘 놀았지.


그날 밤, 잠들기 전 날날이는 동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해줘서 속상하다고 말했어.


“날날아. 친구가 날날이 마음대로 안 해서 속상했지. 근데 친구한테도 마음이 있지?”


“나도 내 마음이 있어. 나도 권리 있어.”(요즘 날날이는 '권리'라는 말에 꽂혀있어)


“맞아. 날날이한테도 마음이 있고 권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건 나쁜 거야. 그건 친구의 자유를 빼앗는 거거든. 그럴 권리는 날날이한테 없어. 날날이 마음이 소중한 것처럼 친구 마음도 소중하게 대해 줘.”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를 본 걸지도 몰라. 이건 꼭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럼에도 조금씩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5살이 되면서 날날이는 남자/여자를 구분하게 됐어. “그건 여자 같은 거잖아”라는 말도 해. 그래. 때가  거지. 속상해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어. 이 남자아이가 멋진 사람으로 클 수 있도록 잘 도와줘야겠구나.



지옥에 살지 않도록


<소녀와 소년, 멋진 사람이 되는 법>@홍현진


날날이와 자주 함께 읽는 <소녀와 소년, 멋진 사람이 되는 법>이라는 책이 있어. 여자라서 이래야 한다, 남자라서 이래야 한다는 말에 조목조목 의문을 제기하는 유쾌한 책이야. 남자아이들에게 다정한 소년이 되라고 하고, 당당하게 겁 많은 사람이 되라고 하고, 슬플 때는 펑펑 울라고 해.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고 작은 꿈을 꿔도 된다고.


책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얘기가 나와. 아직 아이에게는 어려울 것 같아서 빼고 읽어주는데 날날이가 조금 더 크면 차근차근 알려주려 해.


너는 남자라는 이유로 니가 원했건 원치 않건 젠더 권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권력 때문에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 당장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니가 남자이기에 당연하고 편하게 누리는 것들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니가 서 있는 자리를 늘 의심하고 조심하라고. 그리고 또 하나. 여자는 억압하거나 지배해야 할 성적 대상이 아니라 너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아이에게 잘 알려주려면 나와 남편부터 공부가 필요하겠지.  


분노는 이제 그만 할래. 여자로서, 엄마로서, 시민으로서. 긴 싸움을 시작하려 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도록.
 



-3월 26일. 며칠째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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