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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r 17. 2020

회사 일은 결코 내 일이 될 수 없는 걸까?

[주영에게] 야근이 늘어난 너를 보며



편지를 받고 정말 놀랐어. 요즘 내가 고민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거든.


지난해 말 송년회 때 니가 그랬잖아. 앞으로 회사 일을 더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그때 내가 그랬지. 회사 일을 그 이상 어떻게 열심히 하냐고, 니가 해야 할 역할을 하면 되는 거라고. 회사 일은 결코 내 일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정색했나 싶었는데 얼마 후 니가 그해 ‘올해의 사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간의 노고가 인정받았구나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어. 아, 주영이는 이제 회사 인간이 되는구나.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겠구나.


늘 회사와 나를 분리하려 애썼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즐겁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잘하고 싶었고 보람도 있었지. 퇴사한 지 2년 가까이 돼서 전 직장 후배와 교환 일기를 쓰고 있는 걸 보면 나는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에 가까웠는지 몰라.


하지만 회사 일이 내 모든 것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경계했다는 말이 더 맞아. 난 적당히가 잘 안 되는 사람이잖아.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회사가 곧 내가 되면 상처가 쌓이더라. 늘 나만의 공간을 확보해놓고 싶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회사와 나를 분리한다는 것



맥주 먹고 싶다. jpg(<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스틸컷)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의 히가시야마도 나랑 비슷했던 것 같아. 악착같이 정시에 퇴근하는 히가시야마에게는 몇 가지 트라우마가 있어. 회사와 일이 삶의 전부가 돼버려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 거기에는 신입 시절 히가시야마 자신도 포함돼.


히가시야마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무리하지 말자”야. 저녁 6시 10분까지 도착해야 쟁취할 수 있는 반값 맥주를 마시는 히가시야마의 표정이란. 캬. 나 이 드라마 보면서 맥주 정말 많이 마셨다. 히가시야마는 말해. 이걸로 충분하다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행복한 얼굴을 한 채.


처음에는 이 드라마가 그냥 칼퇴하는 여자 이야기인 줄 알았어. 드라마는 칼퇴할 수 없는 사람들, 칼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서사를 함께 보여줘. 회사 일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 말이야.


사실 히가시야마가 정시 퇴근을 할 수 있는 건 좋은 조직 문화를 가진 대기업에 다니기 때문이야. “회사를 위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회사가 있는 것이다.” 이 회사의 슬로건이야.


그렇게 좋은 회사라도 모두 히가시야마처럼 정시퇴근을 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히가시야마는 별종 취급을 받지. 누군가는 불안해서, 누군가는 인정받고 싶어서, 누군가는 일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일이 정말로 좋아서, 누군가는 일밖에 할 게 없어서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해(아,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과노동을 종용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지. 이 이야기는 다음에).


예전의 나 같았다면 히가시야마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을 거야.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일하는 거냐고. 무리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이번에 드라마를 볼 때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더라. 니 편지 때문이었을까.




내가 오만했어



내가 아는 너는 신기하리만치 인정 욕구가 크지 않은 사람이었어. 그 말은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지 않다는 거지. 조직 내 역할이나 관계 같은 것도 무관심했고. 개인주의자, 자유인. 내가 생각하는 니 모습이었어. 나쁜 의미는 아니야. 그런 모습 덕분에 너와 이야기할 때면 해방감을 느꼈어. 내가 너무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 싶었지.

  

그랬던 니가 내가 퇴사한 후 야근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어. 양육자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건 일-육아 곡예가 더 힘들어진다는 걸 뜻하잖아(지금 이 글도 나는 며칠째 끊어서 쓰고 있어).


내 짐을 너한테 떠넘기고 온 게 아닐까, 회사가 너를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닐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기 착취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러다 건강을 잃지는 않을까 안타까웠어.  


그런데 말이야. 지난번에 니가 보낸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른 사람의 일을 너무 납작하게 바라봤구나.  


선명히 느낄 수 있었어. 니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애호하고, 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점점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있다는 걸. 더는 니가 마냥 걱정되고 챙겨줘야 할 것만 같은 후배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올해의 사원상 아니라 올해의 노예상 아니냐고, 이러다 회사 건물에 비석 세우는 거 아니냐고 놀려댔지만 몰입과 헌신의 경험을 통해 너는 분명 성장하고 있었어. 나 같은 사람은 얻지 못할 경험이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어.




일에 목숨을 거는 일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더라@freepik



9년간 한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 밖에만 나가면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어. 회사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매일 같은 루틴만 반복하고 있는 내가 겁쟁이처럼 느껴졌지. 보험 들어놓는 심정으로 회사 일 아닌 내 일에 더 집착했던 것 같아.  


퇴사 후에야 알게 됐어.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걸. 불쑥불쑥 그때의 일 경험이, 그때의 인연이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걸 깨달아. 무엇보다 내게는 일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동료가 남았지.


드라마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어. 일이 곧 삶이 되어버린 동료를 걱정하는 히가시야마에게 신입 시절 상사 이시구로는 말해. 모든 걸 걸고 일하는 기쁨도 있다고. 히가시야마는 되물어. 목숨까지 걸고 할 일은 아니지 않냐고. 이시구로는 이렇게 말해.


“우리 노동자들은 많든 적든 일에 목숨을 걸고 있어. 죽을 때까지 귀한 시간을 대부분 노동에 바치고 있지.”


우리는 모두 많든 적든 자신의 목숨을 연료로 일을 하고 있어. 회사 안이든 회사 밖이든 본업이든 딴짓이든. 어떤 게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다들 저마다 스케줄과 사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결국 살기 위한 각자의 선택일 뿐”이라는 니 말처럼 말이야.    


주영아, 퇴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지. 지금도 나는 온전한 회사 인간으로는 살지 못하고 있어. 토막 시간을 쪼개서 매일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중이야. 이걸 거창하게 모험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끔은 한 가지에 모든 걸 걸고 일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기도 해. 나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을 찾는 내가 말이야.


나는 이런 사람인 것 같아. 숨 쉴 구멍이 필요한 사람. 안 그럼 또다시 못 버티고 부러질 것 같거든. 링거를 자주 맞다 결국 퇴사한 그때처럼 말이야.


그래도 다행인 건 예전처럼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땅에 발을 굳게 딛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무리 울고 도망쳐도 숨을 곳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거든.


아무래도 너나 나나 무리하지 않는 건 틀린 것 같아. 이거 하나는 약속하자. 내 몸을 챙기기로. 몸이 망가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2020. 3. 17

스마트폰으로 글 쓰느라 엄지 손가락에 마비 온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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