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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n 28. 2017

모성에 대한 다른 질문

모성이데올로기와 모성알레르기 사이에서

-지난 토요일 남편, 아이와 함께 과천에 다녀왔다. 과천 동네서점 ‘여우책방’에서 열린 ‘모성이데올로기와 모성알레르기 사이에서’ 집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혼자만 홀가분하게 갔다 오고 싶었지만 껌딱지 남편이 안 떨어지려고 했다(나 혼자만 힘들 수 없다!). 과천은 생각보다 멀고 차는 막혔으며 서점 근처는 공사 중이라 진입이 어려웠다. 덕분에 20분 정도 늦었다. 남편은 아이랑 이마트에 보내놓고 노트를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가 얼마만인가.

      

-아이를 낳기 전 마지막으로 읽고 정리한 책이 <만들어진 모성>이었다. 아,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2년 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말했다. 내가 낳은 아이가 괴물이라면, 나를 증오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아이는 아무나 낳고 키울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아. 난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      



임신한 몸으로 <케빈에 대하여>원작을 정독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그래서 엄마라는 역할이 버거운 에바는 나와 참 닮아있었다. 사람들은 케빈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게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했지만 나는 에바를 옹호하고 싶었다. 이 비극은 엄마의 탓도 아이의 탓도 아니라고.      


<만들어진 모성>을 읽으며 모성애란 타고나는 게 아닌 사회적 산물이라는 대목에 밑줄을 친 건 어쩌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뱃속에서 아이가 나왔을 때 모성이 샘솟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건 본능이 아니라고. 출산과 육아는 너무도 힘겨운 일이라는데, 나는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놀랍게도 나는 아이에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엄마가 되어있었다. 나보다 아이가 먼저였고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참을 수 있었다. 자연주의 출산에 가까운 방법으로 자연분만을 했고 200일간 모유수유를 했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아이가 태열 때문에 아토피가 있었을 때는 식단조절을 하느라 한동안 밀가루를 끊기도 했다. 청소라고는 한 달에 한번 할까 말까 하던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닥을 쓸고 닦고,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르고 달래며 이유식을 떠먹인다.         


주변에서는 말했다. 엄마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모성애라는 게 참 대단하다고. 그 말이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너도 별 수 없는 엄마구나. 그런 반응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랑과 애착을 아이에게 느꼈다. 눈물 나도록 힘들다가도 아이의 웃음을 보면 눈물 나도록 행복했다. 아이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아이가 아파서 자지러지던 어느 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며 오열하는 나를 보며 가장 놀란 건 내 자신이었다.     


궁금해졌다. 이런 감정이 정말로 만들어진 것일까. 내가 엄마이기에 당연히 느끼는 건 아닐까. 아니면 뼛속 깊이 뿌리 내린 범생이 기질이 육아에서도 발휘되는 걸까. 뭐든 열심히 해서 잘하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범생이. 혹은 작고 약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가 낳은 아이이고 나는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하니까.        


복직을 앞두고 모성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출산 후 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내 일을 할 거라고. 아이 때문에 내 커리어가 중단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돌이 지난 지금, 나는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꼭 아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복직해서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길 생각을 하면 주책맞게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내 미래에 대한 고민에서 아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모든 게 모성이데올로기의 산물일까. 모성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면서도 모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 과천까지 간 이유다.       



-집담회 패널은 5명. 여성학자 이경아, 50대 엄마 ‘피노’, 30대 엄마 ‘인어’, 육아하는 아빠 ‘배고파’, 탈가정 20대 ‘소이’. 패널들과 플로어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갔는데 메모를 하지 않아서 기억 남는 내용만 몇 가지. 정확한 워딩은 아니고 내가 소화한 대로 풀어 쓰자면.      


-플로어에 있던 20살 아이를 둔 엄마. 엄마는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동안 품고 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성이 생기는 것 같다. 자다가 아이가 깨면 아빠는 세상 모르고 자도 엄마는 아는 것도 그런 이유. 그러자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둔 한 엄마. 둘째가 태어났을 때 첫째와는 다르게 내 자식 같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었다가 낳았는데 나도 남편도 전혀 닮지 않아서 유전자 감식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두 돌 될 때까지는 모성이 아니라 이 작고 힘없는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인류애로 아이를 키웠다. 플로어에 있던 또 다른 여성. 실제로 아이에게 모성을 느끼지 못하는 엄마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모성이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 사연들이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      


-여성학자 이경아. 호르몬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모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더크다. 모성이란 다양한 유형이 있을 수 있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모성이란 극히 일부 형태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귀족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직접 키우지 않고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아이를 보내서 키우도록 하는 모성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도 있었다. 현재의 모성은 엄마를 휴먼 엔지니어, 아이를 사회에 적합한 부품으로 만드는 역할로 한정 짓는다. 모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육아하는 아빠 배고파.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늘 도망칠 여지가 있었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육아에 정책임자, 부책임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아내가 정책임자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성, 부성이라는 게 저절로 주어진다기 보다는 아이와 나이 관계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30대 엄마 인어. 헬리콥터 엄마 밑에서 자라며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엄마라는 역할극 때문에 엄마도 나도 힘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로 살 수는 없을까, 아이에게도 내 욕망을 투영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서 인류애로 둘째를 키웠다는 엄마. 엄마가 아니라 나로 살기 위해서는 육아를 외주화 해야. 조부모에게 맡기거나 도우미를 쓰거나. 특히 어린 아이에게는 정말로 손이 많이 간다. 쉽지 않은 일.      


-여성학자 이경아.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는 있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없다. 아이도 자신의 생명을 만들어내는 주체.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아이를 키우려고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아이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모성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집담회가 다소 중구난방으로 흘러간 면이 있기는 했지만 평소 혼자 고민했던 것들, 혹은 놓쳤던 것들을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손을 들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소심증 때문에 번번이 기회를 놓쳐서 아쉽지만.     


배고파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뱃속에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모성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내 몸이 내 몸같지 않고 무겁고 불편하기는 한데 뱃속에 정말로 생명체가 있기는 한 건지 답답할 때가 많았다(아이가 태동을 할 때 에일리언처럼 느껴졌다는 선배도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달라졌다. 아이가 하루하루 커가는 걸 보면 정말로 예쁘고 애틋하다. 나와 남편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콩만한 세포였던 아이가 인간의 꼴을 갖춰간다는 게. 내 피와 살로 만들어진 생명체 같은 느낌(이런 표현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직감했다. 나와 이 아이는 별개의 인간이 될 수가 없구나. 우리는 질척거리는 관계가 되겠구나.      


남편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가 육아휴직중이라 아이와 절대적으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남편과 아이의 유대가 나와의 그것보다 약한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은 적을지 몰라도 육아참여의 질은 높으니. 남편은 회사 일 이외의 모든 시간을 육아와 집안일(우리 가족의 먹거리는 전적으로 남편 담당이다)을 위해 쏟는다.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아니라 남편이 육아휴직을 썼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이에 대한 사랑, 유대감은 비슷해도 내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감정이 하나 있다. 바로 죄책감. 남편이 아무리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결국 주양육자는 내가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은 내가 좋은 엄마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평가한다(나는 그 평가의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댄다).      


‘그래도 돌까지는 모유수유 하지’, ‘이유식은 직접 만들어 먹여야지’, ‘돌도 안 된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 3살까지는 엄마가 데리고 있어야지’ 


아무도 이런 말을 아빠에게 하지 않는다. 엄마의 모성이 아빠의 부성보다 커서? 사회에서 정책임자의 역할은 엄마가 하는 게 맞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지금 내 옆에 놓여있는 어린이집 알림장에 적힌 문구. ‘엄마와 함께 이야기 해요’). 반면 남편은 육아에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대단한 아빠로 칭송받는다. 


모성이 본능이냐,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냐라는 질문은 성격이 타고나는 것이냐, 양육된 것이냐라는 질문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엄마의 모성만 관심의 대상이 되느냐고. 왜 아무도 부성에 대해서는 묻지 않느냐고.    


픽션이기는 하지만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엄마가 아닌 아빠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된다. 권력을 가진 이갈리아 여성들은 말한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이를 본 적이 있냐고. 이에 반기를 든 이갈리아 남성들은 깨닫는다. 남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짓고 가사노동과 육아에 갇혀 살도록 한 것은 자연질서가 아닌 인류의 간계였다고. 이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모성 역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모성에 대한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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