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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25. 2019

"나한테 투자해봐" 남편과의 협상

[엄마의 퇴사] 내 퇴사는 나만의 일이 아니다

“남편은 뭐라고 그래?”



퇴사하겠다는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이었다. 나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회사 계속 다닌다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 그러던데.”



나는 속에 고민을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다. 말이건 글이건 밖으로 표현하고 끝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린다.


퇴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퇴사를 하고 싶은지, 퇴사 이후에는 뭘 하고 싶은지 남편과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내 퇴사는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까지, 세 식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는 공동 운명체였다.


복직 후 다시 퇴사병이 도졌을 때만 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만 있었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앞으로 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처음에는 일단 그만두고 생각해야지 했다가, 번역 대학원 진학해야지 했다가, 여성학이나 사회학은 어떨까 고민했다가, 그냥 이직해야지 했다가, 나도 작은 서점이나 차려볼까 했다가, 아예 서울이나 한국을 떠날까 했다가... 이 모든 생각을 나는 남편에게 계속 말했다. 그것도 매번 아주 진지하게.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나 내일 출근하면 퇴사한다고 말할 거야, 말리지 마”라고 했다가 아무 일 없이 퇴근하기를 수개월. 어떤 날은 도저히 회사 못 갈 것 같다가, 어떤 날은 다닐 만했다가. 매일 자아가 분열했다. 나도 남편도 점점 지쳐갔다.


내가 하도 퇴사 이야기를 많이 하니 나중에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출근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신발 갈아 신기 


그는 신발을 갈아 신지 못해서 후회하고 있었을까(이미지 출처 : pexels)



남편은 첫 직장에서 아무 계획 없이 퇴사했다. 전문직이라 이직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불안감에 힘들어했다. 그 사이 아이가 생겨서 더욱 그랬다(퇴사를 하니 애가 생기더라...).


남편이 퇴사할 때, 왜 이직할 곳을 구해놓고 나가지 않냐며 걱정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회사에 오래 다닌 한 상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 신발을 신은 상황에서 다른 신발로 갈아 신기는 어렵지.”


얼굴도 본 적 없는 상사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는 신발을 갈아 신지 못해서 후회하고 있었을까. 그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남편은 그렇다고 무작정 신발을 벗어버리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었다. 퇴사를 하는 건 좋지만 ‘그래서 앞으로 뭘 해서 돈을 벌 건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글 다루는 일을, 남편은 숫자 다루는 일을 했다. 이상을 좇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남편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단 회사 다니면서 해보라고 나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반응이 너무 서운했다. 남편과 나는 21살에 처음 만났다. 오래 연애했고 결혼 기간까지 합하면 10년 넘게 연인이자 친구로 지냈다. 남편은 나를 가장 잘 알고 또 믿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거 해보라고, 선택을 응원해주면 안 되는 걸까. 왜 저렇게 계산적으로 구는 걸까. 회사 다니면서 해보라고? 지금 애 보고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든지 뻔히 알면서. 내가 저런 인간을 믿고 일을 그만둬도 될까.'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나면 퇴사 생각이 쏙 들어갔다. ‘그래,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내가 돈을 벌어야 해.’


 



굶어 죽진 않겠지만


세상에는 먹고 사는 것 이외에도 돈 들어갈 일이 많았다(이미지 출처 :  pexels)



남편 혼자 벌어도 세 식구 먹고사는 건 지장 없었다. 남편의 소득 덕분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내 집 마련의 꿈을 꾸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포기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 당장 돈을 벌지 않는다고 해서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남편이 더 야속했다. 당신이라도 꿈을 이루라며 아내 공부 뒷바라지한 남편, 아내에게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라며 퇴사를 먼저 제안했다는 남편들의 기사 링크를 카톡으로 보냈다. 보라고. 세상에는 이런 남편도 있다고(그런데 너는 왜 못 그러냐고).


기사를 찬찬히 읽어본 남편은 말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려고 퇴사하는데, 나만 돈 벌면서 희생해야 해? 여자가 남자 뒷바라지하는 건 욕하면서, 남자는 그렇게 하라는 거야? 그건 네가 말하는 평등에도 어긋나는 거 아니야?”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너무 맞는 말이어서. 아이에게 ‘우리 집 가훈은 평등’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평등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가사에서도 육아에서도, 시가와의 관계에서도 남편과 내가 매번 부딪치는 건 바로 그놈의 평등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등을 부르짖던 내가, 이제 와서 내 꿈을 위해 남편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부당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속으로 한방 먹었으면서 겉으로 의연한 척 맞받아쳤다.

 

“너도 하고 싶은 일 있으면 회사 그만둬. 적게 벌고 벌게 쓰면 되잖아. 우리가 지금 맞벌이라 시발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서울 아닌 곳에서 살면 아끼면서 살 수 있어.”



내가 생각해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얘기였다. 남편은 화를 냈다. 지금 생활을 정리하는 게 어디 그리 쉽냐고. 애 어린이집은 어떻게 할 거냐고. 맞다. 어린이집이 있었지. 3살인 아이는 7살까지 다닐 수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막 합격한 상황이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일반 어린이집에 비해 비용이 더 들었다.


내가 돈을 벌지 않는다 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먹고사는 것 이외에도 돈 들어갈 일이 많았다. 당장 올해는 시아버지 환갑, 내년에는 친정엄마 환갑, 몇 년 후에는 친정아빠 칠순과 시어머니 환갑이 같은 해에 돌아온다. 결혼하니 가족 행사가 왜 이리 많은지. 지금 살고 있는 집 대출금도 걱정이었다. 일 년에 몇 번씩 가던 여행도 가기 어려워지겠지. 외식도 줄여야 하고. 건강검진은 어떻게 하지.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하자 내가 회사 다니면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피부로 다가왔다. 정말 불안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편의 현실감각이 야속했는지도.


만약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가정해보자. 등록금은 퇴직금으로 충당한다고 하더라도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한동안은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가족의 도움을 받거나 시터를 고용해야 할 수도 있다. 남편의 육아와 경제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다 억울해질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남편 눈치가 보일 거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이미지 출처 : pexels)



남편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방적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남편의 꿈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가 될 자신은 없었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는 상황을 나뿐만 아니라 남편 그리고 아이까지 감당해야 한다니. 팔조차 뻗을 수 없는 좁은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현실만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나중에 '그때 신발을 갈아 신을 걸' 후회하지 않도록.


현실적인 요소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건 돈보다는 시간이었다. 대신 그 기간을 정해 보기로 했다. 남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나한테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면 어때? 너무 길게 생각하면 서로 부담스러우니까 딱 1년만. 퇴직금 있으니까 내 생활비는 내 돈으로 쓰고, 그 후에는 어떻게든 다시 돈 벌게. 나중에 네가 하고 싶은 일 있으면 그때는 내가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혹시 알아?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너는 회사 그만둬도 되는 날이 올지.”



퇴사를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하자 훨씬 부담이 덜했다. 100세 시대에 고작 1년인데, 그 정도는 나한테 보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좁았던 방이 조금은 넓어졌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 차, 엄마 3년 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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