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이은지-엄지윤이 반갑고도 아쉬웠던 이유
'영리하다.' 넷플릭스 <코미디 로얄>을 보고 든 생각이다.
<코미디 로얄>에서는 "현시점에서 가장 핫한" 코미디언 20명이 코미디 대결을 펼친다. 이경규, 탁재훈, 문세윤, 이용진, 정영준 다섯 명의 마스터가 각자 팀을 구성해서 3라운드에 걸쳐서 개그를 보여준다. 1라운드는 꽁트 대결, 2라운드에서는 '로스팅(독한 농담으로 풍자와 디스를 하는 코미디의 한 장르)' 대결, 3라운드에서는 웃음 참기 대결을 펼친다. 1위를 차지하는 팀은 '넷플릭스'에서 쇼를 런칭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심스러웠다. tvN <코미디 빅리그>가 12년 역사를 뒤로한 채 종영되고, 3년 5개월 만에 부활한 KBS <개그콘서트>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K-코미디'를 전면에 내건 프로그램이 과연 재미있을까. 웃기는 일은 쉽지 않다. 웃음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다. '웃긴지 안 웃긴지 한 번 보자'라는 기대를 갖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를 만족시키기란 더욱 어렵다.
<코미디 로얄>은 단순한 코미디 대결을 살짝 비튼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형식을 결합해 코미디를 둘러싼 반응과 고민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코미디 로얄>은 '코미디에 대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가깝다. 누구보다 웃기는 것에 진심인 코미디언들은 서로의 코미디가 재밌으면 재밌다고, 별로면 별로라고 솔직하게 반응을 보여준다. 여기에 맥락을 부여하는 위트 있는 자막과 속도감 있는 편집이 더해진다.
▲ 넷플릭스 <코미디 로얄>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개인적으로는 <코미디 로얄>을 보면서 코미디 그 자체보다는 코미디언들의 반응을 보면서 웃게 될 때가 더 많았다. 서로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개그를 잘하는지 잘 알고 있는 코미디언들은 동료가 야심 차게 준비한 개그가 망했을 때 마음껏 조롱하고 놀린다. 이러한 반응조차도 코미디라는 작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하기에 유쾌하다. 의욕이 앞선 탓에 실패한 개그를 남발하는 곽범에 대해 황제성은 인터뷰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비호감적인 단어들을 다룰 때는 포장을 굉장히 고급스럽게 해야 합니다. 코미디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기본인데. 재미도 없고. 본인 정관도 없고(곽범은 본인의 '정관 수술' 경험에 대한 개그를 계속한다- 기자 주)."
동료들의 반응 덕분에 곽범의 반복적인 '노잼'은 오히려 재미 요소가 된다. 30~40분씩 6화에 걸친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왁자지껄한 코미디언들 사이에서 함께 쇼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코미디는 끊임없이 선을 넘나드는 작업이다. 똑같은 소재라도 아이디어, 연기력, 맥락,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온다. 똑같이 누군가를 공격해도 어떤 개그는 불쾌감을, 어떤 개그는 통쾌함을 준다. 20명 코미디언들의 '웃기는 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하나의 질문이 맴돈다. '코미디란 무엇인가.'
<코미디 로얄> 출연진은 <코미디 빅리그> 등 지상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이들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코미디 레이블 '메타 코미디'를 필두로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들이다. 요즘은 지상파와 유튜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지상파 출신은 스스로를 '정통파'라 부르고, 유튜브를 통해 인지도를 얻은 이들은 '유튜브에서 웃기는 게 더 어렵다'라고 말한다.
각기 다른 플랫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들의 코미디에 대한 철학 차이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2화에 등장하는 '숭간 교미'가 대표적이다. 원숭이들의 짝짓기를 꽁트로 풀어낸 '숭간 교미'는 메타 코미디 대표인 정영준 팀이 선보인 코미디였다. 곽범은 '원초적이고 태초적인 게 웃기다'라면서 아이템 선정 배경을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코미디언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40년 경력 코미디언 이경규는 정색을 하면서 '하지마, 나라망신이야'라고 화를 낸다. 이경규는 "코미디의 기본은 공감대"라면서 "온 가족이 보고 전 세계가 보는데 선을 넘어버렸다"라고 혹평을 한다. 하지만 정영준의 생각은 다르다. 정영준은 "모두에게 보여주는 코미디는 아무도 안 본다"라면서 "이경규 선배님이 활동하시던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코미디가 전달돼야 했던 시기였고, 저희(시대)는 자기의 취향에 따라 구독을 결정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영준은 이렇게 덧붙인다.
"혹시 내가 전국노래자랑에 힙합을 들고 나왔나?"
메타코미디는 '피식대학', '숏박스', '빵송국' 등 프로그램을 흥행시키며 MZ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정영준의 말처럼 2020년대는 '모두를 위한 코미디'보다는 취향을 뾰족하게 파고들어 매니아층을 형성하는 코미디가 대세인 시대가 됐다. 그럼에도 '숭간 교미'가 잘 풀어낸 코미디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 넷플릭스 <코미디 로얄>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 넷플릭스 <코미디 로얄>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재미있는 것은, 실패했다고 평가받았던 '숭간 교미'가 이후에 커다란 웃음 한 방을 터트리는 맥락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이경규의 재치가 번뜩인다. 정영준의 말처럼 모두를 위한 코미디는 없다. 그럼에도 잘 짜여진 코미디는 있다. 잘 짜여진 코미디를 잘 살리는 것이 코미디언의 몫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은지와 엄지윤이다. 이은지와 엄지윤은 개그맨들 사이에서 '잘한다'라는 평가를 연달아 받으면서 활약을 펼친다. 힙합의 디스전처럼 코미디로 서로를 공격하는 '로스팅'에서 이은지는 이상준을 상대로 능숙하고 여유 있게 독한 농담을 던지고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엄지렐라'로 유명한 엄지윤 역시 선배인 문세윤을 상대로 한 로스팅에서 기승전결이 잘 갖춰져 있는 코미디를 보여준다. 문세윤은 "저를 상대로 로스팅을 했지만 멘탈도 좋고 톤도 좋고 연기력도 좋고 아이디어도 좋"았다면서 "후배들의 개그에도 배울 것이 있다"라고 말했다.
'웃겨야 한다'라는 강박에 무작정 욕설을 내뱉고 원색적인 공격을 하는 일부 출연자들 사이에서 두 여성 출연자의 존재감은 더욱 빛났다. 맥락 없이 더럽고 성적인 '화장실 개그'에서도 이은지와 엄지윤은 한 발 벗어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안전한 개그'를 보여준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특히 3라운드 '웃음 참기 대결'에서 절박하게 코미디를 하는 다른 참가자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20명의 코미디언 중 여성 코미디언은 이은지와 엄지윤 단 두 명이다. 마스터 5명 중에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 <코미디 로얄> 소개 글에는 '한국에서 지금 가장 핫한 코미디언 스무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라고 적혀 있다. 20명 중에 단 2명만 포함시킬 정도로 K-코미디에서 여성 코미디언의 존재감이 희미한 걸까.
여성 코미디언 중에서도 이은지, 엄지윤처럼 이미 검증된 이들뿐만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언더독(under dog)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황제성처럼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40대 여성 코미디언도 나왔다면 어땠을까. <코미디 로얄>을 보면서 문세윤, 이창호 등 기존에 알았던 코미디언들의 다른 매력을 알게 되고 나선욱, 이선민 등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됐기에 이러한 아쉬움은 더욱 컸다.
11월 28일 공개된 <코미디 로얄>은 대한민국 톱10 시리즈에서 1위에 올랐고 이후에도 10위권 내에 안착해 있다(12월 8일 기준). 프로그램에 대한 호오는 갈리지만 <코미디 로얄>이 코미디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즌2에서는 좀 더 신선한 구성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