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읽는 여자] 운전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법
서른아홉에 면허를 땄다. 서른여덟까지 나는 내가 평생 운전을 못 할 줄 알았다. ‘기계치에 길치인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운전이 두려운 마음 한편에 운전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는 건방진 생각도 있었다. 도로에 운전하는 사람이 널렸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운전면허학원 개나리색 자동차에 앉았을 때 이런 생각은 와장창 깨졌다.
신입 사원 이후 그토록 많이 혼나본 건 오랜만이었다. 처음에는 점잖은 말투로 가르치던 강사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짜증이 섞였다. 조심스레 운전하면 왜 이렇게 생각이 많냐며 혼났고 과감하게 운전하면 왜 이렇게 겁이 없냐고 혼났다. 혼이 나면 정신을 바짝 차리는 사람이 있고 혼이 나면 정신을 놔버리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였다. 한겨울인데 땀이 뻘뻘 났다.
장류진 단편소설 〈연수〉에는 나처럼 운전에 도전하는 여자 ‘주연’이 나온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연은 이미 구 년 전 면허를 땄지만 운전 공포증 때문에 장롱면허로 살아왔다는 것. 명문고에 합격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고, 현재 회계사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운전은 유일한 실패의 경험이다. 주연은 자신이 운전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운전대를 잡은 나, 그러니까 액셀과 브레이크를 순간 헷갈리거나, 깜빡이를 깜빡한 채로 차선을 바꾸거나, 좌회전하면서 중앙선 왼쪽으로 진입해 역주행하는 나 때문에 도로의 약속된 질서가 망가지고 모든 게 박살 날 것만 같았다…중략…아무리 연습해도 이제 혼자 운전을 해봐야겠다는 결심보다는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운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만 들었다. -장류진 〈연수〉 중에서
한 번도 혼자 도로로 나가본 적 없던 주연은 출퇴근 때문에 운전 연수를 결심한다. 비혼인 주연은 깐깐한 맘카페에서 입소문이 난 중년의 여자 강사를 소개받는다. 주연은 연수를 받으면서도 사고와 충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내가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있을까 봐", “꾸물거리다가 다른 차와 부딪힐까 봐" 주연은 겁난다. “처음 겪는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처럼 초조”한 마음. 주연의 공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렵게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은 다음, 나처럼 혼나는 것에 취약한 후배에게 운전 연수 강사를 소개받았다. 후배가 건네준 연락처에는 이름은 없고 ‘여자 연수 선생님'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첫날 연수를 받으면서 후배가 왜 이 선생님을 소개해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는 손녀가 있다는 선생님은 본인의 집안사를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나의 신상을 캐물으면서도 유독 운전과 관련해서는 단 한 번도 혼을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사흘간 열 시간 연수를 받는 내내.
운전면허 학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수없이 들었던 말은 ‘어깨에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 핸들을 너무 꽉 쥐지 말라고, 여유를 가지라고. 선생님은 달랐다. 지금은 핸들밖에 믿을 게 없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거라고, 앞으로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거라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다 살려고 그런 거예요. 본능인 거야.” 속도를 내지 못하는 나 때문에 뒤차가 빵빵 경적을 울리면 선생님은 느긋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정 급하면 앞질러 가겠지. 초보는 무조건 천천히.”
도로는 정답 없는 시험지 같았다. 그것도 매번 다른 변형 문제가 나오는 시험지. 운전면허 시험에서는 공식을 외우면 됐지만 도로에서는 공식이 통하지 않았다. 교통 상황, 날씨, 앞차, 옆차, 뒤차의 사정을 내가 모두 예측하거나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 번 시험을 친다고 끝도 아니었다. 이건 운전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초보보다 더 엉망으로 위험하게 운전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연수를 마치면서 선생님은 강조했다. 무조건 계속해야 실력이 는다고. 선생님의 말을 믿고 실수를 상수라고 생각하며 차츰 운전 반경을 넓혀갔다. 뒤에서 신경질적인 ‘빵' 소리가 들릴 때면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대신 미안하고 고맙다는 의미로 착실히 비상 깜빡이를 켰다. 이번 주에 멘탈이 붕괴돼도 다음 주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행히 도로에는 초보를 배려해 주는 친절한 운전자가 많았다. 운전은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운전면허를 딴 지 2년. 벽을 시원하게 박은 훈장이 차 옆구리에 새겨져 있지만, 여전히 후진 기어 넣을 때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려야 할지 왼쪽으로 핸들을 돌려야 할지 헷갈리지만, 나는 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혼자 서울에서 강화도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꽉 막힌 명절 귀성길 운전도 해봤다. 실수가 쌓일수록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넓어졌다. 나를 조금은 믿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는 가끔은 한 손으로도 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 선생님 말 듣기를 잘했다.
<엘르 코리아> 디지털판에 '여자 읽는 여자'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3주에 한 번 글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