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Apr 08. 2024

손절한 친구에게 '좋아요'를 눌렀다

[여자 읽는 여자] 끝나버린 관계를 정리하는 마음 

'손절'한 친구의 SNS에 ‘좋아요’를 눌렀다. 시트콤처럼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황급히 취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했다. 그리 아름답지 않게 멀어진 관계인 데다 SNS도 진작 언팔로우하고 몇 년 간 연락 한 번 안 했는데 난데없이 ‘좋아요'라니.    


손절 이후 한동안 그 친구에 대한 언급만 나와도 뜨거운 불에 손을 대기라도 한 것처럼 괴로웠다. 일방적인 관계는 세상에 없다. 내가 상대방을 견딘 것처럼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는 서로를 참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 관계의 유효 기간은 끝났다.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자면 나의 치부도 함께 들춰내야 하기에 나는 자꾸 도망을 쳤다. 마치 그런 관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친구와 연결된 관계조차 모두 끊어낼 정도로 나는 회피의 끝판왕이었다.


소파에 앉아 실수로 좋아요를 눌렀을 때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로 아직 시멘트 냄새가 남아 있는 새 집에 수십 개의 박스가 쌓여 있었다. 박스를 하나씩 풀고 물건을 꺼내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구분했다. 보관할 것 중에서도 당장 필요한 물건과 언젠가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다시 분류했다.

 

제일 골치 아픈 건 책이었다. 당장 필요하지는 않은데 언젠가는 볼 것(봐야 할 것) 같아서,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나중에 봤으면 해서, 저자가 사인과 함께 선물한 책이라서 등등. 각기 다른 이유로 차마 버릴 수 없는 책이 왜 이리 많은지. 특히 미련이 남는 건 깊이 읽은 책들이었다. 20대의 나, 30대의 내가 삶의 변곡점마다 붙들고 있던 고민에 숨구멍과 동아줄이 되어준 책. 하지만 이제는 내 삶과 저만치 멀어져 버린 책.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책.


먼지가 쌓인 책을 펼쳤다 수없이 밑줄을 치고 책 귀퉁이를 접어둔 흔적에 흠칫 놀랐다. 그토록 애면글면 몰두했던 고민이 지금의 내게는 전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한편으로 허무했다. 성충이 된 나비가 자신이 벗어놓은 껍데기를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책을 정리하면서 김소연 시인이 쓴 에세이집 <어금니 깨물기> 속 문장을 떠올렸다.


한번 움직인 이후에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오질 않는다. 움직인다는 것은 그래서 나를 영영 보내버린다는 뜻과 같다. 그렇게 여러 번 나를 보냈고 나를 나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보내진 나는 어딘가에 있다.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이 ‘나들'일 것이다. 나는, 나를 보내기 이전까지만 내가 머무는 장소일 뿐이다.- 김소연, <어금니 깨물기> 중에서


내가 지나왔고 통과해온 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 그럼에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을 나.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책들에는 지난날의 ‘나들’이 있었다. 다시 보지 않을 책을 서재 제일 아래 칸에 꽂아둔 건 그 시절의 나를 잊지 않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공간은 내어주고 싶었다. 결국 책장을 하나 더 주문했다.


김소연 시인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세이집에서 시인은 자주 걷고 자주 멈춘다. 그리고 “시와 나의 간극", “살아가는 내가 살아가야 할 나와의 간극" 사이에서 섬세한 언어로 문장을 써 내려간다. “보이던 것이 다르게 보일 때까지, 다르게 보인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때까지.”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멈춰서 가만히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노트에 필사를 하기도 했다. 시인이 쓴 글을 읽는 것도, 필사를 하는 것도 20대, 30대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책도, 독서법도 달라진다.

  

더는 서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이가 됐지만 친구와의 관계는 내 삶에 선명한 인장으로 남았다. 아마 친구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관계의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해서 관계의 모든 과정과 순간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삶의 한때라도 우리가 연결되어서 혼자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을 시도할 수 있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어줬다면, 그것만으로 관계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삶의 어느 계절에 우리가 좋은 친구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각자에게 다른 계절이 왔을 뿐이다.


책 한 권 쉽게 버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자 ‘좋아요’를 누른 것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부끄럽지 않아졌다. 그 후로 SNS 사용량이 현저히 줄기는 했지만 말이다.



*<엘르 코리아> 디지털판에 '여자 읽는 여자'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3주에 한 번 글을 싣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랜서의 견적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