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읽는 여자] 나는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
회사를 떠난 사람, 서울을 떠난 사람, 한국을 떠난 사람.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책을 사 모으고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기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기 있는 이들과 분명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당신들과 자유를 추구하는 나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 오만을 떨었다.
서울을 떠나지도, 한국을 떠나지도 못했지만 회사는 떠났다. 세 번의 퇴사 끝에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회사를 안 다녀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세 번째 퇴사를 하고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번어던지’기란 불가능하며, 떠나온 곳에서도 삶의 구질구질함은 계속된다는걸. 어쩌면 그게 삶의 본질이라는걸.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떠나는 결심이 얼마나 어려웠는데(나는 첫 직장을 무려 9년 동안 다녔다),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고? 회사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매일이 설레고 월요일 아침에도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일이 재미있고 보람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막막함과 괴로움은 항상 존재했다.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엉엉 울면서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 했고,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견디는 인내심도 필요했다. 회사를 떠나서도 모멸감과 비참함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불안과 초조는 말해 뭐해. 더는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곳에 천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는 회사는 떠나는 결심을 하는 ‘곰 사원'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어린 시절 꿈이 작가였던 곰 사원은 생계 걱정 없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가구 영업 사원이 된다. 지은이인 이수연 작가는 실제로 가구 영업 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입사 6개월 동안 아무런 실적도 쌓지 못한 곰 사원은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저녁도 주말도 없이 열심히 일한다. 멈추지 않아야만 불안하지 않기에 곰 사원은 스스로를 계속 갈아 넣는다. 동료 직원들과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로 외모를 꾸미고 가끔은 거짓말도 하면서 곰 사원은 점점 실적을 쌓아간다. 그럴수록 곰 사원은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성과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오렌지 여우 선배’의 모습은 ‘왜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어느 날 아침 곰 사원은 여우의 귀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책 속에서 곰 사원은 영업을 위해 고객들의 집을 찾아다닌다. 낯선 사람에게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는 심리 때문일까.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 때문일까. 고객들은 곰 사원에게 누구나 마음 한편에 있는 “울렁거리고 메슥거리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딘가 조금씩 결핍돼 있는 고객들의 모습을 마주하며 곰 사원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안 선다는 곰 사원에게 중년의 ‘새 고객’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사실, 정상이 아닐지도 몰라요. 혼란스러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삶은 모두에게 처음이니까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잘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분명히 이 모든 과정이 어떤 형태로든 곰 사원과 저의 인생의 한 조각이라는 거요. 세상에 무가치한 일은 하나도 없어요.- 이수연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 중에서
얼마 전 첫 직장을 함께 다니던 동료를 만났다. 첫 번째 퇴사 후 내가 보낸 우여곡절의 시간을 알고 있는 동료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회사를 계속 다닐 걸 후회한 적 없냐고. 나는 답했다. 회사 밖이 어떤지 알기에 만약 지금 다시 회사를 다닌다면 예전보다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데 이제 나는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삶은 녹록지 않다. 일감이 언제 끊길지 모르고 아파도 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 휴가지에도 노트북을 들고 가야 하고 휴일에도 종종 일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퇴사가 의미 없는 일이었냐면, 세 번의 퇴사를 통해 나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할 때 조금은 덜 괴로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됐다.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도. 새 고객의 말처럼 ‘삶은 모두에게 처음'이며 ‘세상에 무가치한 일은 하나도 없'다. 내가 통과해온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는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불완전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매일매일 묵묵히 내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낸다. 때로는 삶이 이렇게 별볼일 없는 거냐고 징징대면서.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엘르 코리아> 디지털판에 '여자 읽는 여자'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3주에 한 번 글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