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2015년 9월
여행4일차.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 안. 아이폰에서는 little person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1이라는 숫자에 놀랐다. 벌써 9월의 첫째날. 시간은 참 잘도 흐른다. 로밍을 안 해왔고 유심칩도 남편만 신청을 해서 와이파이가 되는 숙소에서만 휴대폰을 한다. 물론 스마트폰 중독이 어디 가겠느냐만은, 그래도 '단절'된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여전히 시차 적응을 못했고 꿈속에서는 회사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나오며, 후다닥 마무리 짓고 나온 기획은 어찌됐나 궁금해 남편이 네이버를 켤 때마다 곁눈질을 하기도 한다. 타고난 성격이 어디 가겠냐. 그래도 조금씩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아니 그러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안식월, 9월 한달은 그래도 되는 시간이니까.
스페인 여행은 정말 행복하다. 아름답다. 감동적이다. 이런 식상한 단어들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좋다'. 남편은 몇 번이나 눈물이 날 것같다고 했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처럼. 오늘은 내내 몸이 안 좋아서 힘들었는데 버스에서 좀 잤더니 살 것같다. 세비야에서는 플라멩고를 볼 거다.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이번 여행이 남편과 내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끝과 시작, 남편의 프로필 문구처럼.
2024년 8월
-스페인에 갔을 때 썼던 여행 기록을 우연히 컴퓨터에서 찾았다. 2015년에 입사 5주년을 맞아 안식월을 받아서 갔던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이 남편과 내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걸맞게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임신을 했고 남편은 이직을 했다. 스페인 여행은 둘이 갔던 마지막 해외 여행이 되었다.
-아마 이 글은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썼던 것 같다.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라는 대목을 보고 피식했다. 이번에 팔라완에서 썼던 여행 기록과 결론이 똑같잖아. 나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내 안에 있는 답을 매번 다르게 깨닫고 있는 건 아닐까. 같은 길로 돌아간다 해도 완전히 똑같은 반복은 없겠지만.
-스페인에서의 기억을 여전히 곱씹는 우리는 아이가 태어난 후 스페인 여행을 위한 10년 적금을 들었다. 2026년에 세 식구가 같이 스페인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밤 늦도록 해가 지지 않던 세비야에서 아이와 함께 타파스를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