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Jun 30. 2022

발리에서 홈트를

대자연 요가를 꿈꿨지만

‘발리에 가면 꼭 요가를 할 거야.’


한국에서라면 잘 입지 않을 화려한 색깔의 요가복을 샀다. 요가 매트 위에 깔아놓을 요가 타월도 발리와 어울리는 에스닉한 문양으로 주문했다. 파란 하늘과 초록 나무 사이로 적당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요가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요가의 성지라는 우붓에 가자마자 집 근처 요가원을 검색했다. 한국으로 치면 편의점처럼 요가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는 요가원이 없었다. 구글맵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요가원을 찾았다. 홈페이지를 보니 주변에 논밭이 펼쳐져 있고 오두막 같은 곳에서 요가 수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만 봐도 평화가 밀려왔다. 내일 아침은 여기다.  


아침 수업을 가려는데 남편이 4살 아이와 함께 요가원 앞까지 데려다주겠다 했다. 그때도 지금도 아이는 새벽형 인간이라 온 가족이 아침 6시면 눈을 뜬다. 걸어서 30분이니 산책하는 겸 다녀오면 되겠지, 새로 산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후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붓은 걷기 좋은 관광지가 아니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더욱. 자동차와 바이크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제대로 안 돼있어서 길 한 번 건너려 하면 좌우를 몇 번이나 살펴야 했다.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보도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길이 끊기거나 부서져 있었다. 유모차를 끌다가 번쩍 들었다 곡예하듯 여행을 다녔다. 하필 이날은 유모차도 안 들고 나왔다.


1시간 만에 도착한 요가원@홍밀밀


가볍게 아침 산책 삼아 길을 나섰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이와 함께 논밭을 지나고 닭과 고양이를 만나고 또 논밭을 지났다. ‘구글맵이 잘못됐나' 생각할 때쯤 저 멀리 사진에서 봤던 풍경이 보였다. 오는 데만 거의 1시간이 걸렸다. 남편과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요가 수업 등록을 했다. 오두막에 들어서자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내 옆에 앉았다. 내향형 인간은 이런 곳에서 입을 더욱 굳게 다문다. 왠지 나 빼고는 다들 요가 고수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분주한 사람이다. 운동을 가면 습관처럼 옆 사람을 의식하게 됐다. 곁눈질하며 몸매와 운동복을 살피고 나보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했다. 선생님이 동작을 지적하면 금세 주눅이 들었다.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기만 해도 자동으로 몸이 경직됐다. 잘하기 위해 혼자 용을 쓰면서도 ‘이건 나한테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최면을 걸었다. 열심히 하는 티를 내는 것도 싫었다. 중요한 일인데, 게다가 열심히까지 하는데, 잘 못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러면서도 잘 못하는 나를 자꾸만 의식했다. 어떤 날은 분명 운동을 하러 간 건데 머리를 더 많이 쓴 것 같았다.


잠시 후, 다부진 체격의 남자 선생님이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인처럼 보이는 선생님은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동작을 따라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사람들 실력도 내 실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외국인이라고 해서 요가를 잘할 것 같다는 생각 자체가 근거 없는 편견이었다. 언어만 다를 뿐 그들도 나와 똑같은 관광객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면서도 월등히 잘하는 사람에게 눈길이 자꾸만 갔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던 걸까. 선생님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Don’t be rush.

(서두르지 마세요)

Everyone has different body and different experience.

(우리 모두는 다른 몸과 다른 경험을 갖고 있어요)

Don’t look back. look forward.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 앞을 보세요)

Feel silence.

(고요함을 느껴보세요)


발리에 갔을 때 나는 새로운 회사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준비하다 포기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창업을 하려면 모든 걸 올인해야 한다는데, 창업을 하려면 나를 갈아 넣어야 한다는데, 창업을 하려면 비즈니스 모델이 명확해야 한다는데. 4살 아이를 키우면서 남들이 말하는 창업의 기준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이미 창업을 해서 멋지게 사업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다른 이들과 나를 비교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와 누군가의 빛나는 정점을 비교하니 당연히 막막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조급해졌다. 결국 창업이 아닌 이직을 택했다.


그때 요가 동작을 어떻게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선생님의 목소리만큼은 생생하다. 배경 음악처럼 깔렸던 빗소리도 함께. 그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직 내게만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다시 논밭과 닭과 고양이와 어지러운 도로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한 번 와본 길이라 30분 정도 걸렸다. 아침 내내 혼자 아이를 돌본 남편은 이미 지친 얼굴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이미 밥을 먹었고 나 혼자 늦은 조식을 먹었다. 남편은 내일도 요가하러 갈 거냐고 물었다. 자기는 정말 괜찮다고(물론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가를 가기 전까지만 해도 발리의 대자연 속에 여유롭게 요가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모습을 떠올렸다(그때만 해도 아직 브이로그가 유행하지 않았을 때다). 내가 혼자 여행을 왔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가족, 그것도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상황에서 매일 시간을 빼서 혼자 요가원에, 그것도 왕복 1시간 넘게 걸려서 갔다 오는 것은 분명 욕심이었다. 엄마가 되면서  시간은 더는 나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욕심을 내는 순간 육아는 어려워졌다. 그 욕심이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있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매트 없는데 바닥이 대리석...@홍밀밀


발리에 머무는 동안 매일 홈트를 했다. 출산 후 골반 불균형 때문에 걸을 때마다 무릎 통증이 느껴졌다. 많이 걷는 날에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 걷는 느낌이 들고 발목도 불편했다. 아침마다 유튜브를 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무릎 마사지를 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한결 다리가 가벼워졌다. 오두막에서 멋지게 요가하는 사진은 남지 않았지만 홈트 습관만큼은 오래 남았다.


발리를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서두르는 마음이 생길 때면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몸과 경험을 갖고 있다는 말이 내게는 그래서 우리 모두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서두를 일도 뒤를 돌아볼 일도 없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사랑하는 방콕의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