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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Aug 06. 2019

완벽한 할머니라는 환상

[엄마도 엄마를 몰라서] 나는 모성신화의 가해자였다

부산역에 도착하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태풍이 온다더니 하필 오늘. 엄마는 부산역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주차를 못 했다며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비를 맞으며 5분 정도 걸어 엄마 차에 캐리어를 실었다.


엄마는 마트에 가야 한다고 했다. 장을 못 봤다고. 비는 오고 기차에서 한숨도 안 잔 애는 졸리고 나도 피곤하고… 지금 마트에 꼭 가야 하냐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우리 오기 전에 장 안 보고 뭐 했냐는 말도.


마트에 가자 엄마는 제일 먼저 생선을 샀다. 이것저것 고르더니 엄마는 아이와 나를 반찬 코너로 데리고 갔다. 반찬 3팩에 만 원. 엄마는 아이가 어떤 반찬을 좋아하냐며 세 팩을 고르라고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상했다. 시어머니 같았으면 아이가 오기 일주일 전부터 장 보고 아이가 좋아할 음식과 반찬을 잔뜩 준비했을 텐데. 평소 아이 음식은 아예 만들지도 않으면서(우리 집 요리 담당은 남편이다), 집에서도 산 반찬 먹이면서. 나는 괜히 뾰족해졌다.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 집에 갔더니 엄마는 당장 밥이 없다며 햇반을 데운다. 2분 30초 데운 햇반과 7분 데운 삼계탕이 식탁에 올랐다. 남편과 함께 부산에 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남편은 말했다. 장모님은 59년생이 갖기 어려운 쿨함을 장착하고 있다고. 자식에게 모든 걸 쏟아붓거나 늘 자식이 먼저인 전통적인 어머니 상은 우리 엄마와 거리가 멀었다.


친정에만 다녀오면 몸살이


부산행 KTX 열차. 구세주 폴리.


친정에 가기 전부터 마음이 마냥 편치는 않았다. 친정 부모님은 아이를 잘 못 본다. 아빠는 애를 열심히는 보는데 금세 체력이 방전되고 엄마는 애를 그저 보고만 있다.


친정에 오면 엄마는 주로 집안일을 한다. 우리 밥 차려주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남는 시간에는 TV를 보거나 스마트폰 하면서(엄마는 요즘 BTS에 빠져있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언젠가 엄마는 말했다.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서울에는 남편이라도 있지, 부산에 오면 아이 보는 일은 대부분 내 몫이 된다. 아이는 수시로 엄마를 찾고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갑자기 환경이 바뀐 탓도 있으리라. 친정에만 다녀오면 나는 몸살이 난다.


시가는 정반대다. 시부모님은 아이를 열과 성의를 다해 돌본다. 시어머니는 밤에 근육통 약을 삼키고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자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와 정말 열심히 놀아준다. 시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시가에서 아이는 엄마아빠를 전혀 찾지 않는다. 잠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잔다.


부산에 간 첫날. 저녁 식사 준비하느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놀아주자 아이는 심통이 났다.


“나 원주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지금 갈래!!!”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 뛰어들어 놀아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그걸 잘하는 편은 아니다. 가끔씩은 아이와 노는 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 나도 이런데 나이 든 엄마는 더 할 수 있지, 생각해 보지만 가끔씩 아이와 놀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엄마를 보면 답답하고 속상하다. 이럴 거면 왜 아이 보고 싶다고 부산 오라고 한거야.


그러면서 어린 시절 종종 생각했던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는 거다.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다른 걸까.’


보통의 엄마, 보통의 할머니


한때 엄마가 살았던 영도에도 놀러갔다(여기가 엄마가 살던 동네는 아님...)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랐다. 초등학교 때였나. 바느질 숙제가 있었는데 똥손인 내게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엄마는 나와는 달리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지 만드는 걸 잘했다. 엄마에게 숙제 좀 도와줄 수 없냐고 했더니 돌아온 말. “니 숙젠데 왜 내가 하노.”


중학교 때. 늘 맛있는 도시락 반찬을 싸오는 친구가 있었다.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도 맛있는 반찬을 먹고 싶다고 하자 돌아온 말. “그럼 가꺼 먹으면 되겠네.”


엄마는 엄마에게도 인생이 있다고 했다. 희생과 헌신? 엄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래도 내게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나를 징글징글하게 사랑해준 사람. 내 얼굴만 봐도 할머니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헤어질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쉬운 얼굴이 됐다. 늘 언제 오냐고, 더 먹으라고,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엄마의 쿨함과 대비되는 할머니의 질척거림을 나는 사랑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지하게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보통 엄마는 엄마 같지 않으니까. 한동안 나는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게 엄마에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 나는 모성신화의 가해자였다.  


보통의 엄마와 달랐던 엄마는 보통의 할머니와 다른 할머니가 됐다. 부산 할머니보다 원주 할머니를 좋아하는 아이를 볼 때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내 아이는 나 같은 외할머니를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슬퍼지기도 한다.


엄마가 애를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니 공사장 십장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엄마를 달달 볶는다.


“날날아 ‘할머니’한테 해달라고 해.”“날날아 ‘할머니’한테 놀아달라고 해.”

“TV 너무 많이 보는 거 아니야? 몇 시간째야.”

“시부모님은 애를 얼마나 잘 보는 줄 몰라. 애가 잠도 시부모님이랑 잔다니까. 부산만 오면 너무 힘들어.”


30대가 된 딸은 엄마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콕콕 골라서 한다.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던 10대 시절처럼.


그렇게 부산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원동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 할머니 집에서 차를 타고 나와 예쁜 카페에 갔는데 엄마는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추석 때까지만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관둘까 싶다고.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20년 가까이 해온 일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고, 나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고, 최근까지도 캐나다에 있는 남동생 학비를 댔다.


엄마는 이제 나이도 너무 많고 영업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좀 쉬고 싶다고. 그렇다고 아예 쉴 수 없으니 다른 자격증이라도 따 볼까 싶다고.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팔순 넘은 할머니는 새벽부터 밭일하느라 지쳤는지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제야 엄마가 평소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벌써 환갑이었다. 아픈 곳 많고 체력도 많이 떨어진 할머니가 됐다. 대체 나는 엄마에게 뭘 더 바라고 있는 걸까.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어


세상이 요구하는 모성이 버거웠다. 모성에는 수백, 수천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으며, 엄마도 감정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는 것. ‘마더티브’ 활동하며 가장 많이 전했던 메시지였다.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자 나는 비로소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계속 엄마에게 ‘좋은 엄마’, ‘좋은 할머니’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엄마를 계속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내가 원하는 부모의 상은 여전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모성신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호주 드라마 <렛다운> 주인공 오드리


호주 드라마 <렛다운>에는 우리 엄마는 저리 가라 할 ‘쿨녀’ 친정엄마가 나온다. 주인공 오드리는 결혼이 여성을 재산 취급하는 제도라며 결혼을 거부할 정도로 페미니스트이지만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연분만을 고집하다 죽을 뻔한 경험을 하고, 출산 후에도 끊임없이 다른 엄마와 자신을 비교한다. 내가 나쁜 엄마는 아닐까, 나 때문에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면서. 오드리는 자신의 일, 자신의 이름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늘 죄책감을 느낀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오드리에게는 가까이 살면서도 육아에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친정엄마 베러티가 있다. 베러티는 자신의 인생과 딸의 인생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친구 생일 파티에 가기 위해 하루만 아이를 봐달라는 오드리에게 베러티는 데이트 때문에 어렵다고 잘라 말한다. 오드리는 그런 엄마가 야속하다. 엄마가 자신을, 자신의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의심스럽다.


오드리가 남편 제러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베러티와 함께 외할머니 집에 간 날. 오드리는 무심한 엄마에게 결국 폭발해 버린다.


“엄만 제가 아이를 낳은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 별로 관심도 없잖아요. 절 가르쳐줄 수도 있잖아요.”

“배워서 엄마가 되는 게 아니야. 직접 부딪혀야지.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굴지 마라.”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엄마와 딸. 장면이 바뀌고 오드리는 외할머니 집 마구간에 있는 말에게 진심을 털어놓는다.


“난 후회해. 가끔 아빠가 엄마 대신 살아계셨으면 했던 것 말이야. 또 후회되는 건 엄마의 성격이 좀 달랐으면 하고 바랐던 거야. 내가 철없고 이기적인 것도 너무 싫어. 난 만족할 줄도 모르지. 엄마를 함부로 판단한 것도 미안해. 내가 꼭 엄마 같네.”


오드리의 말이 꼭 내 마음속 이야기 같았다. 오드리는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에게도 자기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엄마를, 꽤 오래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내가 엄마가 되자 엄마에게 서운한 게 더 많아졌다. 육아에 도움을 못 주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안다. 엄마도 엄마로 살면서 많은 걸 희생하고 포기했으리라는 걸. 엄마로 산다는 건 필연적으로 많은 걸 잃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어쩌면 지금도 엄마는 엄마의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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