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째 <쓸 만한 인간>으로부터
치앙마이 여행 마지막 날. 택시를 타고 반캉왓 예술가 마을로 향했다. 친구는 근처 쇼핑센터에 들러 남자 친구 선물을 사서 오겠다고 했다.
반캉왓은 치앙마이 지역 예술가들이 만든 마을로, 다양한 수공예품과 갬성 가득한 소품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도착하니 예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워크숍을 열고 있었다.
상점을 한 바퀴 돌면서 치앙마이 풍경이 그려진 엽서와 마그네틱을 샀다. 굵은 실로 바느질된 에스닉한 천가방도 샀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탁 트여 있는 도서관 카페에 들러 음료를 시켰다. 치앙마이의 상징인 초록초록한 나무 사이로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졌다.
무슨 책이 있나 둘러보는데 알 수 없는 글자들 사이 한국어로 된 책이 보였다. 미니멀리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 들르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쓸 만한 인간>이 보였다. 배우 박정민이 쓴 책. 이미 나도 읽은 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 표지를 여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치앙마이 도서관에 한국인 책이라니, 친구도 신기해했다.
“박정민
작가는 아니다.
글씨만 쓸 줄 아는
그저 평범한
당신의 옆집 남자.
가끔 테레비나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박정민의 소개글 아래로 이 책을 도서관에 남기고 간 사람의 이름과 소개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치앙마이에 한 달을 살았다.
…(중략)...
퇴사를 하고 뭐 먹고살지 고민 중이다.”
옆장을 보니 같은 글씨체가 보였다.
“이 책은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하러 왔다가, 하루 만에 읽은 책이에요. 단순히 제목이 좋아서요. 그리고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좋아해서. 이곳 마하사뭇 도서관은, 오늘로 네 번째고, 낼모레면 떠나요. 제가 애정하게 된 이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저 말고도 또 누군가 오래 머물러 가기를, 쓸 만한 이야기를 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두고 가려고 다시 방문했습니다…(중략)... 이 곳을, 이 책을 만나신 모든 분들 행복하세요.”
p.s 여행을 좋아하는 박정민 배우님도 이곳에 오셨으면 ㅋㅋㅋ
퇴사 후 한 달간 치앙마이에 살면서 이 도서관에 세 번 들렀고,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남기려 네 번째로 도서관에 들렀을 누군가의 마음을 떠올렸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예상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
다정한 손글씨 옆에 다른 사람들의 손글씨가 이어졌다.
“여행은 즐거운 것
일상 속의 힐링!
치앙마이 BYE!”
“제가 여행하며 읽은 책의 한 구절인데 좋아서 남겨요. **님 감사해요.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나,
낯선 곳에 와서야 나는 내가
선명하게 만져졌다. 막연히
여행을 찾아 떠난 여행. 다행이다,
나를 만났다.’”
“입사를 앞두고(너무 ‘입사’가 싫어서)
방황하러 여행 왔습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겠죠?...ㅠㅠ”
“입사 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을까요”라는 짧은 문장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토록 원하는 입사였을 텐데 막상 입사 앞에서 두려워지는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치앙마이에 갔을 때는 퇴사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토록 원했고, 오래 준비한 퇴사였는데도 막상 퇴사하니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겁났다. 퇴사가 아니라 그냥 긴 휴가 같았다.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4대 보험 대상자가 아님을 알리는 편지가 하나, 둘 도착하고, 25일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고서야 비로소 퇴사를 실감했다.
아이 낳고 처음으로 아이 없이 떠난 여행. 일주일 내내 카페에 틀어 박혀 글을 썼다. 얼마나 힘들게 온 여행인데,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쓸모 있는 인간임을, 쓸 만한 인간임을 입증하고 싶었다. 불안했고 조급했다.
‘프로 일희일비러’ 박정민도 나처럼 늘 불안해하고 조급해하는 인간이다.
박정민이 쓴 <쓸 만한 인간>은 자기 비하와 아재 개그로 점철돼있다. 100번 던지면 하나는 맞겠지 하는 느낌으로 끊임없이 찌질한 에피소드를 투척하는데 (웃긴 건 분명 아닌데) 피식, 하고 헛웃음이 난다(자다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박정민은 자신을 재물로 삼아 위로를 건넨다.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사니까, 우리 존재 파이팅이라고. 다들 행복하자고.
책 제목을 ‘쓸 만한 인간’이 아니라 ‘찌질한 인간’으로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계속 자잘한 잽을 날리다가 한 번씩 어퍼컷을 제대로 날릴 때가 있다.
37살의 배우 박원상이 20살의 배우 지망생 박정민이 해준 이야기가 그랬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그때를 기다려.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서른일곱 살의 박원상(선배님)이 스무 살의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다. 술 먹고 하신 말씀이라 본인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당시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배우 지망생 박정민은 아직도 그 문장을 마음에 품고 지낸다.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박원상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그렇게 조급함과 다스림을 반복하는 20대 후반의 본인은 다시금 박원상의 말씀을 되새긴다. 자연스럽게 다가올 그때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충실하게 절실하게 하자. 뭐 이러다 또 조급해지기 마련일 테지만 꾸준히 해보려고 노력한다.”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책을 다 읽고 나면
100번 던져서 안 되면 200번, 300번 또 던지고,
매일매일 불안하고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어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박정민이라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어 진다.
내게 <쓸 만한 인간>은 그런 책이었다.
“여기에 읽으신 순서대로 이름 써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ㅋㅋㅋ”
표지 다음, 다음 장을 넘기자 ‘쓸 만한 인간’이라는 제목 아래 1번부터 24번까지 각기 다른 글씨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을 통과한, 쓸 만한 인간들의 이름이. 마치 방명록처럼.
나와 친구는 25번에 함께 이름을 남겼다. 또 다음 장, 박정민 배우의 작가의 말 바로 위에 나도 글씨를 썼다.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엄마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20년 지기 친구와 함께 온 치앙마이. 마음껏 비우고 가득 채우고 돌아가요. 순간을 분명히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되길.
2018. 11. 10
퇴사 후를 고민하는 사람, 여행 와서 비로소 자신을 찾은 사람, 입사 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책에 남아 있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손글씨를 보며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다들 나처럼 방황하며 살고 있구나. 나만 이렇게 삶이 어려운 게 아니구나. 그러니 너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을까.
1년이 흘렀다. 치앙마이에서의 가르침은 까맣게 잊은 채 또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고 애쓰고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다(그 사이 박정민은 작품을 몇 개나 더 찍었고, 펭수코인 타고 대세 중 대세라는 <나 혼자 산다>까지 진출했고 <쓸 만한 인간> 개정판을 냈다).
여전히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계속 쓰는 인간, 쓸 만한 이야기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위안 삼으며,
2020년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 사회와 타인이 정의하는 쓸모가 아니라 나만의 쓸모를 찾았으면 좋겠다. 새해는 그런 걸 다짐하는 해니까.
p.s 치앙마이 도서관에 책 기증하고 가신 분, 정말 감사했어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