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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Feb 18. 2020

왜 엄마로만, 직장인으로만 만족 못하는 걸까

[주영에게] 작당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 거야

주영아, 갇혀 있다는 소식 들었어.


태양이네 어린이집 휴원령이 내려져서 너도 남편도 회사도 못 가고 재택근무하고 있다고.


세 식구가 비상식량 쌓아놓고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이게 무슨 시트콤인가 싶으면서도 눈앞이 캄캄하더라. 얼마나 갑갑할까 싶고.


독감 시즌, 명절 끝나고 나니 코로나 바이러스라니... 이게 무슨 난리니. 아침에 아이 둘인 친구와 연락하는데 온종일 집에만 있으려니 아주 죽겠다 그러더라고. 당장 아이 맡길 곳 없어서 발 동동 구를 엄마들 생각하니 남 일 같지 않았어.



재난 같은 엄마의 



요즘 나도 재난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매년 봄이 오기 전까지 3~4개월 동안 남편이 엄청 바쁘잖아. 그건 곧 내가 독박 육아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 지난 주말에도 남편은 일이 많다며 회사에 출근했어.


이 와중에 아이는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고, 내 컨디션도 안 좋고. 가슴이 몇 번이나 내려앉았나 몰라.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아이가 아프거나 내가 아프기라도 할 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되지.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는 걸까. 내가 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


재작년, 내가 퇴사할 때도 말했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아이가 크면서 그때보다는 훨씬 살만해졌는데도 재난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불쑥불쑥 찾아와.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지.


게다가 요즘은 나도 회사 일이 바빠져서 매일매일 쫓기는 기분이야. 너도 요즘 회사 일이 많다고 했지.


웃긴 게 뭔 줄 알아? 이렇게 바쁘고 힘든데도 끊임없이 이런저런 일을 벌일 궁리를 하고 있다는 거야. 너와 함께 쓰기로 한 이 교환일기만 해도 그래. 주말에 내가 대뜸 교환일기 쓸래? 물어보니 니가 그랬잖아.


“선배, 할 일이 너무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괴로워요. 또 방황 중이에요.”


역시 너도 나와 동족이구나 싶었지. 너도 나 못지않은 시작 천재잖아. 프로시작러.



왜 이리 애쓰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우리 회사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마더티브 시작할 때도 멤버 4명 모두 정말 힘든 상황이었잖아. 3살, 4살 한창 손 많이 갈 나이. 심지어 멤버 한 명은 아이가 둘이었지.


애 재우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점심시간 반납하면서, 남편과 겨우 협상해 주말에 몇 시간 얻어서. 기획하고 글 쓰고 회의하고 아이템 고민하고(그러다 애들이 줄줄이 전염병 걸리면 올스톱).


그게 왜 그렇게 신나고 재밌었을까. 엄마가 되고 나서 한동안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가능성이 막 열리는 것 같았어. 가슴이 뛰었지.


1년 전, 마더티브 창업 계획을 접으면서 몇 번이나 다짐했어. “애쓰지 말자”“무리하지 말자”“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다시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계속 글을 쓰고, 기획을 구상하고, 작당모의를 꿈꾸고 있어. 왜 이렇게 애쓰게 되는 걸까. 애 이렇게 무리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엄마와 직장인이라는 이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한동안은 일종의 모범생 병이 아닐까 생각했어. 평생 너무 열심히 사는 법밖에 몰라서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영영 주저앉게 될까 두려운 게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가 나를 셀프 착취하고 있는 거 아닐까. 제발 내려놓자고, 천천히 차근차근 가자고 수없이 마인드 컨트롤했어.



우리 존재의 핵심



그런데 말이야. 이 애쓰게 됨이 내게는 삶의 원동력이자 숨구멍이 되어주기도 해. 뭔가 일을 벌이고 밀고 나가는 순간,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는 순간.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계속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자신이 되어가는 것 같거든.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


요즘 나는 출퇴근할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이라는 책을 읽어. 아흔 살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인터뷰집이야. 아흔 살이라니, 상상이 가니. 음악에 한 평생을 바친 할아버지는 소년 같은 얼굴로 깊고 단단한 이야기를 들려줘. 거기 이런 말이 나와.


“나는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난다고, 혹은 특정한 뭔가를 탐구하려는 내밀한 욕망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재봉 기술, 정원 가꾸기, 혹은 요리가 될 수도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재능이든간에 우리가 가진 재능이 우리 존재의 핵심이라고 확신합니다.” p.49(e북 기준)


재능을 추구하고 특정한 뭔가를 탐구하려는 내밀한 욕망이 우리 존재의 핵심이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어. 내가 계속 콘텐츠를 만들고 작당모의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특출 난 재능을 가진 건 아니더라도 그게 내 존재의 핵심이니까.


시모어 할아버지는 말해. 삶이 우리가 글을 쓰거나 연기하거나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주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고. 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연주하면 그저 더 나은 음악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시모어 할아버지는 88세에 에단 호크와 찍은 다큐멘터리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너와 나로 말한다면 삶이 글을 쓰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글을 계속 쓰려는 시도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거지. 뭐 꼭 글뿐만은 아니야. 그게 뭐가 됐건 우리의 작당이 우리를 좀 더 우리답게,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 믿어. 이 교환일기도 말이야. 꿈보다 해몽인가.


가볍게 짧게 쓰기로 한 편지가 또 진지해졌네. 내가 이렇지 뭐. 어서 빨리 코로나 지옥에서 탈출하기를 바라.




-2020년 2월 7일. 시모어 할아버지처럼 늙고픈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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