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누들로드>를 쓸 때의 일이다(출판되진 못했다). 제주여행을 하며 국수를 먹는, 두 가지 컨셉이 섞여있는 책이었다. 그것은 제주여행일 수도 있고, 국수여행일 수도 있다.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당연히 국수 책이니 국수 쪽에 맞춰야 하지만 그것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맛을 중심에 둬야 할까? 여행을 중심에 둬야 할까?
출판사에서는 감성에 초점을 맞추길 원했다. 여행은 시기성이 있고, 맛 역시 주관적이며 시간이 흐르면 문 닫는 식당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감성이 중심이 되면 문제가 사라진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감성적이지가 않다. MBTI로 말하자면 나는 전형적인 T다. 그래도 나만의 관점과 감성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뭔가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한. 그래서 출판되지 못했나?
그 후 약 10년이 흘렀다. 나는 주로 밥을 먹으면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는데 그때 일본소설 <츠바키 문구점>을 읽고 빠져있던 상태라 일본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선택한 것이 <방랑의 미식가>였다. 원작은 만화라고 한다.
주인공은 무척이나 소심하고 딴짓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은퇴한 60대 남성이다. 직장을 나가지 않으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되는데 그놈의 소심함 때문에 늘 망설인다. 그럴 때마다 방랑 무사를 떠올리며 그는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하며 용기를 얻는다.
그 드라마를 보니 출판사에서 원했던 감성이 뭔지를 알겠더라. 아, 저런 걸 원했던 거구나. 지금이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땐 그렇게 어려웠을까.
이런 거다. 주인공이 그 음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나온다. 진짜 별 거 아닌 이유인데 무척 공감이 간다. 특히 같은 소심인으로써는 정말 공감된다. 그걸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식당과 음식, 그게 정말 끔찍하다는 걸 또 디테일하게 이야기한다. 영상이니 글과는 다를 것이지만 글로도 충분히 그렇게 쓸 수 있다. 내 수준에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많이 쓰면 달라지리라 믿는다. 양이 많아지면 질도 변화한다고 하잖은가.
나는 대체로 느린 편이다. 동작이 꿈 뜨다는 말이 아니라 뭘 하나 온전히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때 출판사에서 원하던 글이 무엇인지 10년 만에 깨달았다. 젊었을 때 친구에게 ‘난 뭘 깨닫는데 좀 느린 것 같아’라고 했더니 ‘넌 그걸 이제 깨달았냐? 진짜 느리군’라고 했다.
10년 만에라도 알았다는 것이 기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글을 쓸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방랑의 미식가>는 아직 다 못 보았는데 집에서 혼자 밥 먹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챙겨보려고 한다. 그리고 비슷한 류의 드라마도 챙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