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합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해라'는 어른들의 말이 지긋지긋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고 대범하게 놀지도 못했다. 또 공부를 죽기 살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정쩡하게 공부해서 그저 그런 대학교에 들어갔다.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노는 태도는 대학교에서도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에게 일자리를 주는 회사가 없었다. 실업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대학교에서 더 열심히 살았던 친구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난리였다. 나만 취직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나이가 30에 가까워지자 1차 서류심사도 통과되지 않았다. 좋게 생각했다. 차라리 시험 한 번만 통과하면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는 '철밥통' 공무원이 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공무원 학원에 가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학원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렇게 3년을 공부하고 나서 나는 5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당장에 내가 쓸 용돈은 벌 수 있게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했다. 구직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다리가 퉁퉁 붓도록 걸으면서 일해도 시간당 최저임금이었다. 그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붙인 전단지를 아래층에서 사는 할아버지가 공공근로를 하면서 떼는 것이었다. 한 집에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 두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지인의 소개로 택배기사를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시간당 최저임금은 아니었다. 택배 한 건당 내가 오백 원 정도를 가져가는 구조였다. 즉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런데 아무리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도 한 달 수입이 120~130만 원을 넘지 못했다.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수시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한두 달하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남자가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하겠냐는 말에 이 년을 버텼다. 그런데 피로가 누적되어서 몸이 탈이 나고 말았다. 특히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와서 병원신세를 지는 바람에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을 거의 다 탕진하고 말았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창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초기 투자금이 적게 드는 인터넷 쇼핑몰을 차리기로 결정했다. 예전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옷을 잘 입는다는 소리도 들어서 내심 패션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오픈하고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옷을 구입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은 순조로웠다. 내 인터넷 쇼핑몰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연예인과 기업의 스폰을 받고 있는 사이트들은 네이버에 한 달 광고비만 천만 원씩 썼다. 나는 기껏해야 인터넷 기사 댓글에 내 온라인 쇼핑몰 주소의 링크를 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 년도 안 돼서 좋은 경험을 한 셈 치고 폐업을 결정했다.
「아 김씨 뭐해? 한 대 폈으면 빨리 와야지!...」
나에게는 맘 편히 담배 한 가치를 피울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먹고살기 위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말이 좋아 기술을 배우는 것이지 아직 기술다운 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몸만 축나고 있었다.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 현민이는 내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없으니 편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아파트에서 무거운 벽돌을 지고 오르내리는 일이 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늘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박스 깔고 한 잠 편하게 잘 수도 있는 아파트는 천국이었다.
「아 김씨 그거 그렇게 들면 어떻게 해?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닌데 젊은 사람이... 쯪... 」
고속도로 현장은 그늘이 없다. 여기 저기서 흙먼지가 휘날려 밥을 편하게 먹을 수도 없었다. 레미콘 트럭이 만들어주는 열기 나는 그늘에서 마시듯이 냉면을 해치우면 그걸로 끝이었다. 뜨거운 태양과 이글거리는 땅의 열기를 참아내며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을 하고 있으면 하늘이 빙빙 돌았다. 마치 커다란 오븐 구이에서 요리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가 지나면 다들 말없이 옆에 차고 있는 작은 통에서 소금을 찍어먹으며 일을 했다. 그렇게라도 흘린 땀을 보충해야 했다. 옆에 쌩쌩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다.
「아 김씨 그거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사람이 한 번 얘기를 하면 알아 들어야지 거 참...」
그런데 작년에 딸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내 한 몸 책임지면 되는 입장이 아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부서져도 일을 해서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다. 가끔 생각해본다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딱히 큰 잘못을 한 것은 없는데...'
그러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실히 깨달은 날이 있었다. 동창회에 나갔던 날이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옛 친구들하고 한잔 하러 갈 생각에 안 나가던 동창회를 처음으로 나갔다. 찌질했던 병수, 빵셔틀 하던 태형이, 뚱뚱했던 현석이, 오타쿠 같았던 정수... 다들 나보다 잘 나가고 있었다.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네, 이번 보너스로 얼마를 받았네 하는 소리는 딴 세상 얘기 같았다. 예전에 같이 PC방 다니던 녀석들과 자신이 다른 점이 뭔지 따져보자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다들 나보다 좋은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대학교!...'
이 고통을 절대로 내 자식에게는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식은 여름에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휴가도 가고 빨간 날에는 쉬는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삶은 미래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내가 그 토록 싫어하던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내 아이한테는 하지 말아야지 수 만 번 다짐했던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공부해라.」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막막했다. 공부를 못한 자신이 느꼈던 그 고생, 그 수모, 그 모멸감, 그 인간 이하의 삶을 초등학생 아이에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공부를 잘하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 안정된 삶,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 주변 사람들의 대우...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 잘하면 좋아.」
물론 아이가 이해할 리 없었다.
「피. 난 공부 안 할래요.」
「그럼 뭐해서 먹고살건대?」
「누가 그러는데 인터넷 쇼핑몰을 하면 쉽게 돈 잘 번데요. 저도 그거 할래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줄 방법이. 아이도 배운 것 없이, 딱히 기술도 없이 사회에 나가면 알게 될 것이다. 왜 어른들이 그토록 공부하라고 했는지를. 그리고 그 아이도 뼈저리게 고생을 한 후 다시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어른들은 아이들만 보면 '공부해라'라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이가 공부를 하길 원한다면 공부하라는 말을 '절대'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째, 공부하라는 말은 효과가 없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 천 년에 동안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 어른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다. 굳이 나 까지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매일 그 말을 질리도록 듣는다. 왜 공부하라는 말은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 효과가 없는 것일까?
한 남자가 도망치고 있다. 다른 남자는 그를 뒤쫓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는 추격신이다. 이 상황에서 쫓아가는 사람의 대사는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거기서! 서란 말야! 거기 안 서?!」
이 말을 듣고 쫓기는 남자가 멈추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진부한 대사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작가들은 반성? 해야 한다. 어쨌든 서라고 말해도 계속 달려가는 도망자에게 종종 더 격한 표현을 하곤 한다.
「야 이 xxxx, 너 이 xx놈아! 잡히면 xx다! 」
이 때 쫓기는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툭 내뱉는다.
「서란다고 서는 놈 봤냐?」
도망치고 있는 남자가 멈추란 얘기를 듣고 멈추지 않는 이유는 멈출 마음이 1%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공부하란 얘기를 듣고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공부할 마음이 1%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첫 번째 글 아이들의 뇌구조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효과가 없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좀 식상하지만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효과도 없을뿐더러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얘기를 반복하는 것은 우리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 아래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둘 째,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해석이 주관적이다. 고3 동준이는 쉬는 시간마다 휴대폰 게임을 한다. 거의 매일 지각을 하고, 숙제를 제대로 해오는 날도, 심지어 교재를 바르게 챙겨 오는 날도 별로 없다. 어느 날에는 점심시간 동안에 야동을 다운받아 보고 온 적도 있었다. 아이들이 돈을 모아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는데 점심시간 동안에 누가 야동을 다운받았다는 것이었다. 범인을 추적해보니 동준이로 밝혀졌고 아이들은 이동준이라는 이름 대신 ‘야동준’이라는 별명을 선물해주었다.
이런 동준이도 대학교는 가고 싶어 한다. 그것도 좋은 대학교에. 안 되겠다 싶어서 여름 방학에 동준이를 불러서 얘기를 했다. 지금 너의 노력으로는 4년제 대학교는 가기 힘들 것이라고. 그런데 아이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본인은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며 말했다. 더욱이 부들부들 떨면서 서럽게 울기 까지 했다. 충격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이는 정말로 본인이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속 열심히 하자고 말하고 나서 아이를 들여보냈다. 그 날 오후 자습시간에 휴대폰 게임을 하는 동준이의 모습을 보았다.
반에서 1등 하는 아이가 본인의 공부는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반에서 30등 하는 아이가 본인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컨대 공부를 한다는 말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 째, 공부하라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돈을 많이 모아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만나는 어른마다 '돈 모아라'라는 말은 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도 매일 이런 말을 수십 번 씩 듣는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듣다 듣다 어떻게 모으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면 열심히 모으라고 얘기한다. 열심히 모아도 부자가 안 된다고 말하면 목숨을 걸고 모으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모호하게 얘기하는 것은 도움이 별로 안 된다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 싶으면 현재 재정상태를 파악하고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를 정해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부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으면, 적어도 지금 듣는 사람의 수준을 파악하고 어떤 공부를, 어떻게, 얼마나 공부를 하면 되는지 같이 얘기해 주어야 한다. 정작 도움이 되는 얘기는 쏙 빼고 그저 공부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고 공부를 하는 아이는 없다.
일단 ‘공부해라’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와의 갈등 중 50%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아이가 공부를 하길 바란다면 역설적으로 ‘공부해라’라는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
정리하면, '공부해라'는 말을 듣고 공부하는 아이는 없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효과가 전혀 없을뿐더러 오히려 아이가 공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은 아이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업에 영향을 주는 어른들의 행동 지침에 대해 다음 글에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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