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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어떤 이유든 절대로 하지 말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by 홍석철

몇 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목욕탕에 가는 길이었다. 한 할아버지께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또 무슨 종교 믿으라는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보, 보일러...좀...」


할아버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일단 종교는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냐고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할아버지는 한쪽 눈이 좀 불편한 것 같았고,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보통의 인내를 가지고는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보일러가... 안, 안 켜져... 좀, 봐, 봐줘...」


'귀찮은데, 그냥 모른 채 하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가버리면 할아버지께서 또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 매달려야 하는 걸 생각하니 귀찮아도 그냥 내가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를 따라서 문으로 들어갔다. 집은 방 한 칸에 부엌이 달린 쪽방이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집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허름했다. 할아버지는 보일러가 안 켜진다고 봐 달라고 했다. 보일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전원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보니 반응이 없었다.


「할아버지 이거 고장 난 거 같아요. AS 불러야겠는데요? 여기에 붙어 있는 번호로 전화 걸어보세요.」

「그, 그거 아, 안 돼... 해 봤어..」

「이거 되다가 갑자기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작년에는 됐어요?」

「안 켰어... 하, 한 3, 4년 동안, 아, 안 켰어... 그, 그런데, 너, 너무 추, 추워서...」


최근 3, 4년간 보일러를 안 켰다는 말이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떻게 인간이 한 겨울에 보일러 없이 살 수 있지?’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엄청 추웠다. '아니 왜 안 키셨어요?'라는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방세와 세금과 식비, 병원비 등을 제하면 보일러를 튼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남은 방법은 인터넷에서 귀뚜라미 AS센터 전화번호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컴퓨터 어디 있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전화번호 좀 찾아볼게요?」

「콤푸타.... 그, 그거.... 어, 없어.」


그때, 솔직히 난 ‘멘붕’이 왔다. 요즘 시대에 컴퓨터 없이 산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할아버지와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컴퓨터가 없으면 한 인간이 굉장히 무기력해진다는 사실도 경험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 그러면 할아버지 전화번호 좀 적어주세요. 제가 집에 가서 귀뚜라미 AS전화번호를 찾아서 알려 드릴게요.」

「고, 고마워...」


할아버지는 미안할 정도로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신문지 모서리에 적힌 할아버지 성함과 번호를 가지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는데 가스레인지 위에서 식사를 준비하다가 만 된장찌개가 처량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아까 받은 신문지 번호를 보는데 갑자기 귀찮게 느껴졌다. 사람이란 왜 이렇게 간사한 존재일까. '아 씨.. 내 일도 다 처리 못하는 놈이 무슨 남의 일까지 오지랖이냐?'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문지를 휴지통에 버릴까 하다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당시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았으면 그냥 신문지를 구겨서 버렸을 것이다. '남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교육학을 공부하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고 귀뚜라미 AS번호를 찾았다. 한 5분 밖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는데 이게 귀찮아서 신문지를 구겨 버리려고 생각했다는 내 자신이 창피해졌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아까 보일러 봐준 학생입니다.」

「어, 아.. 그 그래... 응...」


AS전화번호를 알려 드렸고 어떻게 하다 보니 이런 저런 얘기를 조금 더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말씀이 자연스럽지 않으신데...」

「으, 응... 이, 이거, 몇, 몇 년 전에 뇌수술 바, 받아서...」

「그럼 지금은 괜찮으세요?」

「하, 하루에 약을 4번씩 먹어... 지, 지금은 괜찮아.」

「아. 그러세요. 할아버지 혹시 자제분은 안 계세요?」

「응... 작은 넘은.. 추, 출, 출판사에서, 이, 일해...」

「그래요? 그러면 왜 자제분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바, 바쁜데 뭘...」

「그럼 그분 말고 또 안계세요?」

「으, 응 크, 큰 놈은 서울대학교 연구원이야! 서, 서울 대학교! 서울대에서!」


혹시나 본인의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대학교 이름을 잘 못 들었을까 봐 여러 번 정확한 발음으로 대학교 이름을 확인시켜주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는 아들을 말할 때 할아버지의 음성에서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아들을 말할 때와는 다른 굉장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나한테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재차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공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서 여러 장면들이 겹쳐서 떠올랐다. 출판사에서 남의 인생을 바꿀 소중한 책을 만드는 작은 아들.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자랑스럽게 연구하는 큰 아들. 한 겨울 길에서 타인에게 보일러를 봐 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


그런데 왜 그런 아들들이 있는데 한 겨울날 밖에서 지나가는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한테 보일러 좀 봐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을까? 아들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하면 될 일을. 아마도 아들들을 부르면 바쁘게 일하는데 피해가 갈 까 봐 아예 연락을 안 한 것일 수도 있다. 대신에 할아버지는 영하 10도의 날씨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혹은 와달라고 전화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을 수 도 있지만 이런 슬픈 가능성을 염두 해두고 싶지는 않다.)


그럼 왜 아들들은 아버지를 한 겨울 그런 쪽방에 보일러도 틀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도록 방치한 것일까? 아마도 아들들도 힘겹게 살아서 도와줄 형편이 안 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니면 먹고 살만한데 모른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요점은 자식이 공부를 잘 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보일러.jpg 그 할아버지를 만났던 이 집을 지나칠 때 마다 요즘은 잘 지내시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얼마 동안 할아버지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특히 그렇게 힘든 상황이 닥쳐도 공부 잘하는 큰 아들을 말할 때 묻어나는 감출 수 없는 격양된 목소리는 그 할아버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어른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를 편애한다.


「와 엄마 옥수수 삶았네?」


작은 아이가 학교 같다가 오면서 가방을 휙 집어 던지고 부엌으로 달려온다. 엄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눈을 흘긴다.


「으이그... 하여간 냄새는 귀신같이 맡아요. 너는 왜 벌써 왔어? 오늘 학원 갔다 오는 날이잖아?」

「응.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들 세미나 한다고... (우적우적) 마지막 교시 동아리 활동인데 (우적우적) 그거 안 해서 한 시간 빨리 (우적우적) 왔어.」


아이는 옥수수 먹으랴 엄마한테 설명하랴 정신이 없다.


「아니 그러면 곧장 학원으로 갈 것이지! 집에 왔다 가면 학원시간 늦을 수도 있잖아?」

「응. 뛰어가면 괜찮아. 배고파서 뭐 좀 먹고 갈려고 왔어.」


아이가 가장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옥수수를 먹으려고 손을 뻗을 때 엄마가 아이 손을 탁 치면서 말한다.


「야. 그건 내비 둬! 형 오면 먹게. 하여간 먹는 데는 사족을 못 써... 어디 공부를 좀 그렇게 해 봐라. 반에서 일등을 하고도 남지!」

「흐흐... 이거 먹고 공부 열심히 할 거야.」


보통 학업에 큰 뜻을 두지 않는 아이는 성격이 쾌활하고 밝은 경우가 많다.


「다녀왔습니다.」


형이 왔다. 엄마는 동생이 집에 들어올 때 하고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응~ 왔어? 어서 씻고 와. 엄마가 옥수수 삶아 놨어. 이거 할머니가 시골에서 방금 따서 보낸 거라서 정말 맛있...」

「됐어요.」


아이는 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에 들어간다. 엄마는 가장 잘 익은 옥수수를 접시에 담고 주스도 유리컵에 따라서 쟁반에 담아 방 문을 두드린다.


「얘. 이거 조금만 먹어봐 지금 쪄서 뜨거울 때...」

「아이. 생각 없는데. 거기 두세요 이따가 먹을게요.」

「응. 그래. 여기 둘 테니깐.. 꼭 먹어봐..」

「네.」


보통 학업에 큰 뜻을 둔 아이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늘 지친 기색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 동생은 옥수수를 먹으면서 말없이 엄마와 형을 바라보고 있다.


「너는 빨리 먹고 학원 가야지 왜 또 밍그적거리고 있어? 」

「괜찮아요. 뛰어가면 금방 가요. 이거 하나만 더 먹고.」

「어이구 그 정도 먹었으면 됐어. 빨리 학원 안 가!」

「네. 알았어요. 이거 먹으면서 가야지. 히히.」


아이는 옥수수를 입에 물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엄마는 학원으로 가는 아이의 뒤에다 마무리 멘트까지 선물해준다.


「누굴 닮아가지고 속은 좋아요 하여튼... 아이고 답답해... 내가 박씨 하면 아주 징글징글해...」


다들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는 대접을 받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구박을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차별을 하는 어른들도 대부분 어릴 때 차별을 당했던 당사자들이라는 점이다.


이 차별은 아주 고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상처가 생기기 때문이다. 피부에 입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에 입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하게 덧나는 경향이 있다. 아직 어리다고 잘 모른다고 함부로 말하고 대하면 안 된다. 마음속에 생긴 상처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60대 한 부부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부부를 죽이고 토막 내서 인근 쓰레기장에 버렸다. 이 사건이 범행 수법이 잔인한 것도 있지만 나라가 발칵 뒤집힌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범인은 바로 둘 째 아들 이었던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동안 말썽 한 번 안 피운 착했던 아들이라는 점이다. 군대에서 제대해서 휴학을 앞두고 있다가 새벽에 술을 먹고 '울컥'해서 부모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사람이 그럴 수가 없는데... 아무리 세상이 흉흉하다지만 울컥해서 부모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학생이 연행되면서 내뱉은 말에서 의문이 풀렸다.


「고등학교 때 도시락도 형은 따뜻한 밥을 직접 갖다 주는데, 나는 그냥 2천 원 주고 김밥 사 먹으라고...」


그렇다. 차별을 받은 것이다. 심성이 착해도 차별을 당한 것이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던 것이다. 가랑비나 소나기나 옷이 젖는 것은 마찬가지다. 소소한 차별도 모이면 큰 차별과 다르지 않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차별은 때때로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나중에 커서 부모 곁에 있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경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평범한 아이들이 부모 곁을 지키는 법이다. TV에 나오는 인간극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치매에 걸리거나 몸이 불편한 노모를 돌보는 자식들은 다 마음이 착한 아이들이지 머리가 똑똑한 아이들이 아니다.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저들 먹고살기 바쁘다.


그리고 기를 쓰고 아이가 의사, 판사, 검사, 교수될 때까지 뒷바라지해봤자 '이제 자식들 덕 좀 볼 수 있으려나?'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결혼해서 빠이빠이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꼭 무슨 덕을 보려고 공부를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세상일이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니 공부 좀 잘 한다고 그렇게 치켜세울 것도 없고, 공부 좀 못 한다고 심하게 구박할 일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차별 때문이다.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당하는 차별은 어쩔 수 없다. 학교에서 당하는 차별도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만 공부에 소질이 없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차별당하고 학원에서 차별당하고 만나는 어른들 마다 차별하고 유일하게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집에서 까지 차별을 당하면 이 아이들은 지구상에서 마음 편히 쉴 곳이 단 한 곳도 없는 셈이 된다. 그래서 서로 차별하지 않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PC방에 가고 집을 나가서 가출팸을 만들고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어른이 아이들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차별'이다. 이는 어른이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차별을 당하면 베알이 뒤틀리고 속이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차별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다.


어떤 이유든 절대로 '차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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