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로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다시 정리하다. 팩트풀니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질문을 몇 개 받았다.
1. 오늘날 세계 모든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될까?
A: 20% B: 40% C: 60%
2. 세계 인구의 다수는 어디에 살까?
A: 저소득 국가 B: 중간 소득 국가 C: 고소득 국가
3.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A: 거의 2배로 늘었다. B: 거의 같다 C: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 외에도 10문제 정도가 더 있지만 문제를 풀고 정답을 확인하니 충격이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정답을 확인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들도 있었다. 그만큼 현실과 세상에 대한 내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팩트풀니스(FACTFULNESS)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는 아니다. 스웨덴 출신으로 의대를 졸업했지만, 통계학자가 되어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를 치료? 하는데 인생을 받쳤다. 2012년에는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 책은 그가 인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물들의 총집합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망치로 머리를 쾅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책이었다.
위 질문의 정답은 1. - C / 2. - B / 3. - A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10가지의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중에서 주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저자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썩 와 닿는 표현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흑백논리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특히 어떤 나라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대신에 4단계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어로는 stage 1. stage 2. 이렇게 될 것이다. 조금 더 기억하기 쉬운 용어를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지 용어의 참신함이 아니니깐..
몇몇 국제기구에서는 한스 로슬링의 주장을 받아들여 더 이상 선진국(developed country)과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 퍼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책을 읽고 스스로의 인식을 정정한다면 세상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는 셈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배우 정우성 씨가, "4살 나탈리가 평화로웠던 유일한 시기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시리아는 내전으로 인해..."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 나라에 가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극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TV에서 안성기 아저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2살 미샤는 3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세요.." 이런 장면을 보아도 저소득층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는 홍보를 위해서 연출된 모습이라고 생각해야 세상을 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 자극적인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사실 미디어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온통 잔인한 사건 사고들 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이 점점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통계적인 수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 세계의 극빈층 비율이 1800년에는 인구의 85%였지만, 1905년에는 50%, 2017년에는 9%로 줄어들었다. 저자는 전 세계의 극빈충이 이렇게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 전 세계의 여러 나라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더욱이 주변에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실업률, 경기 침체, 살인, 테러 등의 부정적인 얘기들 뿐이니깐 말이다.
전 세계의 극빈층 비율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평균 기대 수명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1800년에는 31세였지만, 1960년에는 50세, 2017년에는 72세로 증가하고 있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아, 질병, 전쟁이 줄어들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렇게 세상이 더 좋아지는 확실한 지표들이 있는데 우리는 왜 세상을 계속 부정적으로 볼까? 저자는 세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 째, 과거를 미화한다. 어른들이 흔히 "옛날이 좋았어~"라고 하지만 사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힘들었다. 하루 종일 손으로 빨래를 할 때보다 세탁기가 해주는 게 훨씬 더 편하다.
둘째, 언론인과 미디어의 선별적 보도이다. 뉴스는 특성상 자극적이고 예외적이고 끔찍한 상황들을 보도한다. 이를 계속 보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셋째,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인다는 것이다. 즉 경기도 안 좋고, 먹고살기 힘든데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하면 공감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가 중간 소득 수준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중산층이란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예방접종을 받으며, 자녀들과 정기적으로 휴가를 가고, 때에 따라서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삶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많다.
지금 세상은 지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저자는 자연재해 사망자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를 사람들이 모른다고 지적한다. 공포를 느끼면 인간의 이성은 마비되고 근시안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그리고 미디어는 인간의 이런 허점을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최악의 사태인 양 보도하면서 무자비하게 이용한다.
100만 명당 연간 사망자 수치가 1930년대 453명, 2010년 이후 10명으로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TV에 나오는 지진, 쓰나미, 산불, 홍수, 가뭄 소식에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전 세계적인 이슈가 생기면 모든 언론은 시청률을 의식해 앞다투어 이를 자극적으로 방송하는 경쟁을 한다.
2015년 네팔에 지진이 발생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TV에서 네팔의 집들이 지진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봐야 했다. 옥상에 매달린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구원의 밧줄 같았다.
이 지진으로 약 9,000 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은 아이도 9,000명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울부짖는 부모 품에 안겨 의식을 잃은 아이들을 비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웃의 뜨뜻한 대변이 섞인 물을 여전히 실수로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플라스틱 관, 펌프, 비누, 기본적인 하수처리 장치만 있으면 해결된다. 물론 헬리콥터보다 비용도 훨씬 저렴하다.
2016년에 총 4,000만 대의 상업 항공기가 목적지에 무사히 착륙했다. 치명적 사고를 당한 항공기는 10대에 불과했다. 언론이 집중하는 항공기는 당연히 이 10대다. 전체 항공기 가운데 0.000025%이다.
항공기 100억 명의 승객 중 연간 사망자 수가 1930년은 2000명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꽤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망자 수가 1940년 전후로 확 줄어들고 1950~60년 이후로 거의 사라진다.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 항공 당국은 1944년에 모여 공통 규칙에 합의했다. 이후 항공 사고가 나면 보고 양식을 통일해 서로 공유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사고가 날 때마다 이를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고, 위험 요소를 조직적으로 찾아내고, 안전조치를 개선해나갔다. 저자는 이 시카고 조약을 인간 협력의 눈부신 사례로 꼽고 있다.
이게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가 아닐까? 지구 상 생물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종교/대의/사상/가치 등 어떤 이유로든 모르는 사람과 협력을 해서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테러로 사망한 사람은 3,172명으로, 한 해 평균 159명이다. 같은 기간 미국에서 음주로 사망한 사람은 140만 명으로, 한 해 평균 6만 9,000명이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테러가 아니라 음주인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 1세 아동 중 어떤 질병이든 예방접종을 받은 비율은 몇 퍼센트일까?
A: 20% B: 50% C: 80%
저자는 108회의 강연에서 총 1만 2,596명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정답은 C이다. 그런데 세계 10대 은행에서 A를 선택한 비율은 85%였고, 투자 콘퍼런스는 71%, 북유럽의 보건 과학자들은 69%였다. 세계의 지성인, 오피니언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조금 오해하는 것이(B를 선택) 아니라 매우 틀린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몇몇 이미지로 일반화시켜서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우리는 선진 문명이고 그들은 여전히 발전하지 못한 국가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성향이 있다. 무의식 중에 나오는 성향이지, 다른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고가 제 기능을 하려면 범주화는 필수다. 범주화는 생각의 틀을 잡는 작업이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정말로 처음 보는 것처럼 인식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삶을 이어나가기 어렵다.
저자는 스스로도 일반화의 본능에서 100%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1972년 의대 4학년 때 인도에서 의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첫 수업시간에 신장 엑스레이 판독을 했는데, 인도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다른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교실에 있던 인도 학생들끼리 사진의 모양이 어떤 암이고, 어떻게 진행하고, 어디에 퍼지고, 최선의 치료법이 무엇인지 30분간 전문의만 알 것 같은 설명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순간 저자는 교실을 잘못 들어왔다고 착각하고 나가려고 옆 사람에게 4학년 수업이 맞는지 물어보면서 자리를 뜨려던 찰나, 대학교 4학년 수업이 맞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후 며칠 동안 저자는 그들의 교재는 본인 것보다 3배는 더 두껍고, 그들이 교재를 3배 더 많이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자는 이때 세계관을 바꿔야 했던 인생 최초의 순간이라고 고백한다. 스웨덴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마에 카스트 표시를 하고 야자수가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우월하다고 생각했었다.
서양이 최고이고 그 외는 절대 서양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45년 전 그 수업에서, 저자는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날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운명이라고 거창한 얘기는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운명은 '문화'에 가깝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조상이 돌아가시는 날짜에 제사를 지낸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부모님, 증조, 고조까지 4대를 지냈다고 해서 이를 따르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규율처럼 여기는 가정도 있다.
그리고 추석과 설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런 의식이 한국인들이 절대자로부터 이렇게 하라고 계시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지내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생활양식으로 자리를 잡아서 따르고 있는 행위일 뿐이다.
몇몇 집안에서는 이를 굉장히 크고 중요한 행사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실 제사와 차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이다. 이 문화권의 사람들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이를 관습으로 여기며 따른다.
요즘은 제사와 차례가 많이 간소화되고 안 지내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게 저자가 말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행위일까?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든 부분은 더 흥미롭다. 한국과 일본에서 여성에게 자녀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시부모도 부양하는 책무가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도 많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런 모습들이 아시아의 가치라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인 가치는 아시아의 가치도, 아프리카의 가치도, 이슬람의 가치도, 동양의 가치도 아니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 6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인 현상이며, 다른 나라들처럼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180도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서서히 인식과 행동 양식이 변할 것이다. 스웨덴처럼, 아프리카와 이슬람의 나라들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히잡을 쓴 여성들은 더 이상 관습대로 살지 않고 남편과 가족계획을 세워서 그들의 판단으로 가족계획을 세우고 있다.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한 문화권에서 내려오는 삶의 형태는 서서히 변화한다. 단 그 변화의 속도가 더뎌서 우리 눈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딘 변화는 불변이 아니다.
'역사의 연구'를 집필한 아널드 토인비는 한국의 효 사상을 다른 문화권에서 보고 배워야 한다며 치켜세웠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가 이 책을 읽었다면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아동 사망률' 수치다. 아래는 아동 1000명당 5년 안에 죽는 수치를 나타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1985년에 242명 → 2017년에 35명
말레이시아 1960년에 93명 → 2017년에 14명
아동 사망률 수치는 사회 전체의 온도를 말해준다. 아이들은 취약하다. 아동 사망률 수치가 낮다는 것은 아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세균, 기아, 폭력 등으로부터 아이들이 살아남는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수치는 아이의 건강 상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을 보여주는 수치인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14라는 수치는 대다수 가정이 먹을거리가 충분하고, 하수 시설이 갖춰져 더러운 물이 식수로 흘러들지 않고, 기초적 보건 의료가 잘되어 있으며, 엄마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 가지 지표로 그 사회의 많은 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러나 데이터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1994-2004년까지 모잠비크 총리를 지낸 파스코알 모쿰비는 나라의 경제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인당 GDP보다 5월 1일 전통행사 때 사람들이 뭘 신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그날은 다들 최고로 치장을 하는 날이다. 사람들이 맨발인지,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작년과 비교해보면 시민들의 경제상황을 GDP보다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수치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모두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치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