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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친구 코스프레

친구의 탈을 쓴 어른들에 관한 보고서

by 홍석철

공부하라는 소리를 자제하고, 차별하지 않고,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 아이와 얘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이 시점에서 많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거의 유사하다. 역시 인간은 다 비슷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어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방법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전략이다. 즉 또래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양날의 칼인데 어른들은 한쪽면만 보고 이 칼을 쉽게 꺼내는 경향이 있다.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아이와 대화를 못해본 엄마가 모처럼 시간을 냈다.


「민서야~ 뭐해? 엄마랑 얘기 좀 할까?」


갑자기 나긋나긋해진 엄마의 목소리에 민서는 경계심을 드러낸다.


「왜.. 요?...」

「왜 기는, 오래간만에 우리 딸 요즘 어떻게 지내나 얘기 좀 하려고 그러지.」


한 참을 편안하게 해주자 아이도 긴장을 풀고 엄마를 편안하게 대한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와 얘기를 하면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엄마와 얘기를 하는 딸이 엄마는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손가락으로 바쁘게 게임을 하고 웹툰을 보고 엄마와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다른 사람하고 대화할 때는 휴대폰을 만지는 게 아니라고 아이에게 충고를 하면서 '친구 코스프레'를 종료한다. 친구는 그런 충고를 하지 않는다.


「얘야. 어른하고 얘기할 때는 휴대폰 만지는 게 아니지.」


갑자기 돌변한 엄마의 태도에 아이는 근육이 경직된다.


「아. 네...」


사실 아이는 문제가 없다. 아이가 먼저 엄마에게 친구처럼 얘기하자고 부탁한 것이 아니다. 엄마가 먼저 친구처럼 다가간 것이고 아이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준 것뿐이다. 진짜로 친구들하고 있을 때처럼 편하게 행동한 것이다.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대화하는 것에 익숙하다.


어쨌든 민서 엄마는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와. 엄마 이거 봐봐. 내가 방금 게임에서 아이템 얻었는데 엄청 좋은 거 나왔어. 개이득이네!」

「하하하... 이 만화 되게 재밌네. 핵꿀잼이야! 엄마도 봐봐~ 」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딸의 친구가 되려면 그런 용어를 이해해야 했다. 아니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 줄임 표현을 대충 짐작하면서 알아듣는 척을 한다. 그런데 딸의 표현이 점점 과격해진다.


「엄마, 걔 있잖아. 내 베프 수진이. 걔 알지? 걔 이번 시험 완전 폭망 했어.」

「그래? 왜 그랬데? 공부 안 했데?」

「아니. 걔 남친 생겼잖아. 한 동안 남친 생겼다고 졸라 자랑질하는 게 극혐이었는데... 잘 됐지 뭐야~」

「......」


엄마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은지 한 시간 만에 '친구 코스프레'를 종료하기로 결심한다.


「너 다른 어른들한테도 그런 말투로 하니?」


예고 없이 친구에서 어른으로 돌아온 엄마의 말투에 민서는 싸한 기류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훈계에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민서야. 어른들하고 얘기할 때는 휴대폰 만지는 거 아니다. 그거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


'나도 알아요, 그런데 엄마가 먼저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하자 면서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민서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들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데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엄마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이상한 말 있잖아. 그런 거 하는 거 좋게 보이지 않으니깐 하지 마라.」

「또 말투가 여자애가 그게 뭐니? 좀 교양 있게 얘기하면 안 되니?」

「......」


친구처럼 다가가는 어른들의 결말이 보통 이러하다. 아이 입장에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친구처럼 대했을 뿐인데. 사실 엄마가 원하는 것은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하지만 예의는 갖추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만 교양 있는 말로 표현하라는 것인데 어린아이가 이를 캐치할리 없다. 아이는 '어쩌라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이러한 어이없는 경험이 희미해질 쯤 다시 '친구의 탈'을 쓴 엄마가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도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엄마의 리얼한 연기에 '어? 우리 엄마가 정말로 변했나?'라는 희망을 품고 또 다시 엄마의 연극에 희생양이 된다.


그러니 아이 친구의 역할은 '진짜'친구들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어른은 어른답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좋다. 이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Baumrind라는 연구자는 부모의 유형을 네 가지(권위적인 부모, 독재적인 부모, 허용적인 부모, 무관심한 부모)로 분류했다.


권위형 - 일관성 있게 지시하며 자녀의 사회적, 인지적 능력을 고려하여 성숙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

독재형 - 무조건 부모의 말에 순응하도록 요구

허용형 - 통제나 처벌을 거의 하지 않고, 책임감과 예의도 거의 요구하지 않으며 스스로 행동하도록 허용

무관심형 - 어떠한 기대나 반응도 보이지 않는 자유방임


그리고 각 부모의 자녀들을 조사했는데 권위적인 양육방식을 받고 자란 자녀가 나머지 세 유형 보다 친절하고, 행복하고, 독립적이며, 자신감이 있고, 책임감 있고, 또래 관계가 좋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머지 세 가지 양육방식은 자녀의 사회성 발달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더욱이 이들은 학교의 규칙에 적응하는데 힘들어하며 친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토로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요즘은 멘토링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아이에게 친구 같은 어른이 적지 않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진짜 '어른 같은 어른'이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해서 불신감이 팽배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월호에서 어른들 말을 들은 아이들은 다 죽었어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만연해 있는 불신감의 저변에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어른에 대한 갈망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직 순수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아이들은 진취적이고 멋진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따르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멋진 어른으로 이끌어줄 진짜 어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데 권위적인 부모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한참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해야 할 나이에 하고 싶은 것만 골라 가면서 하지 말라는 부모가 그 당시에는 야속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화 '세도'에서도 세자가 공부는 멀리하고 그림과 무예에 더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 영조가 이를 못마땅해한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공부가 하기 싫어서 예체능으로 진로를 튼 경우다. 영조와 세조는 결국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일어나는 문제다. 이러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허락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항상 해피엔딩은 아니다.


「저 정말 공부는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참고해야지.」

「공부보다는 장사를 배워보고 싶어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정말이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냐?」

「네. 정말 후회하지 않을 게요.」

「그럼 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뒤에 아이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때 왜 저를 때려서라도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어요?」

「.....」


대한민국에서는 고등학생의 학업능력이 이후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직업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일부 동의하는 측면도 있지만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 정도까지 가려면 갈길이 멀다. 물론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가야 하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살 것이라면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이에 대비자는 것이다.


재수를 하는 선영이는 사회복지사가 꿈이다. 성적은 평균 정도이다.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힘들고 생각보다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선영이는 본인을 가장 괴롭히는 수학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국어와 영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부모님이 이에 반대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사회복지사를 하는 데 수학은 필요 없고 대학 입학에서도 수학은 반영하지 않으니 효율적으로 수학보다는 국어와 영어를 더 공부하겠다는데 왜 이해를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부모님은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수학을 놓지말고 끝까지 공부하는 게 좋다.'고 반박했다.


만약 수학이 기본이 하나도 안 되어 있고 현 시점에서 답이 없다면 수학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데 선영이는 수학이 꾸준히 3~4등급이 나왔다. 이를 유지만 하더라도 나중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본인은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꿈이라는 것이 늘 바뀐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직업들이 예상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러데 수학을 포기하고 사회복지학과를 나왔다면 다른 길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의 말대로 이공계열, 예컨대 화학과로 들어가서 사회복지학과를 복수전공을 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물론 복수전공을 하는 것은 힘이 든다. 쉽지 않다. 어렵다. 힘이 든다. 그런데 어차피 세상에 힘이 들지 않는 일은 없다. 어떤 것을 해도 인생은 어렵다. 그러나 젊었을 때 공부를 하면서 겪는 고통과 나이가 들어 막다른 길에 내몰려서 경험하는 고통은 그 깊이와 넓이가 차원이 다르다. 어른들은 이를 알고 있다.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것은 없다. 대학시절 교수님을 떠올려봐도,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해주 과제도 적게 내주는 교수님은 그 당시에는 좋다. 그러나 나중에 졸업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 또래들보다 실력이 떨어서 번번이 취직에서 실패하면 그 때도 그 교수님을 좋아할까? 반면에 가르칠 때는 지독할 정도로 엄하게 가르치고 과제도 버거울 정도로 내주는 교수님은 그 당시에는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를 참고 이겨내서 동료들보다 실력이 좋아져서 취직에 성공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 교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인생은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 학창시절의 5년을 참지 못해서 50년의 인생을 원망과 후회로 보내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학업이 힘들다고 회피하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다.


정리하면,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어른은 친구 같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불미스러운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굳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본인의 스타일 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허락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아이의 성장을 이끌어줄 필요도 있다. 그런데 권위적인 유형의 부모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심지어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른으로서 기준을 버리고 아이에게 맞춘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힘들지만 참고 잘 이끌어 주면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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