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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Jan 31. 2016

28 IQ가 다가 아니다

EQ(정서지능)를 아시나요?

  대기업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6년 차 대리 경석이는 새로운 여자 과장님이 온다는 소리에 한 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설렘이 좌절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장님은 소위 '원칙  주의자'였다. 원리 원칙이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어느 조직에나 그렇게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도 조직의 발전에 나름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다 융통성만 부리면 어떻게 정해진 기한에 어떻게 성과를 낼 것인가. 그런데 새로 온 과장님은 정도가 지나쳤다. 절대로 예외는 없었다. 


  문제가 터졌다. A회사의 부품을 납품받기로 한 부장님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B회사의 부품이 더 좋은데 왜 A부품을 받냐는 것이다. 물론 과장님 말대로 B부품이 불량률이 조금 더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A부품과 B부품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A부품을 만드는 공장은 상무이사님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다. 이러면 대충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심각한 하자가 없는 이상 그냥 눈 딱 감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도 과장님은 본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과장님은 자의반 타의반 조직원들과 멀어져갔고 급기야 밥도 혼자서 먹는 신세가 됐다. 


  새로운 과장님은 똑똑하다. SKY 대학 박사 출신이니 지적 수준에 대해서는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과장님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는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사회생활이 평탄치는 않을 것 같다. 왜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성공을 하는데 IQ가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500년 동안 강조해 온 IQ는 과학과 수학적인 학문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서양을 지배했던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지금도 서양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들이 산다는 나라가 인종 차별, 빈부 격차, 마약 중독, 총기 난사, 사기, 횡령 같은 문제들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성적인 똑똑함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학교에서 국영수사과음미체 등을 가르친다. 말로는 전인교육, 인성교육을 한다고 표방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못하다. 착한  인간보다는 암기를 잘하고 계산을 잘 하는 학생에게 상을 주었다.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늘 지덕체를 강조했지만, 매년 교문에 걸리는 현수막에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남을 위해서 항상 열심히 봉사하는 학생, 따뜻한 마음으로 늘 친구에게 양보하는 학생, 몸이 아픈 친구를 옆에서 도와주는 학생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계산하는 능력만을 습득하게 되었다. 옆 친구가  힘들어해도 경주마 처렴 옆을 보지 않고 내 갈길만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오히려 옆에 친구가 쓰러지면  남몰래 기뻐했다. 경쟁자가 한 명 떨어진 것이니깐. 아이들은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아이들이 사악해서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교육 시스템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똑똑한 친구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지능지수가 높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에서는 열등생일 수 있다. 이에 관한 한 가지 연구가 있다. IQ가 높게 나온 학생들 중에서 나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학생은 몇 % 일까? 연구 결과 대략 20% 정도였다. 생각보다 낮지 않은가? 연구자도 놀랐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일까?


  하버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90명을 대상으로 이후의 삶을 추적한 연구를 살펴보자. 조사 결과 하버드대학을 졸업할 당시 이뤄 냈던 1, 2등과 사회적인 성공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단지 머리 하고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출세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부 잘하는 아이는 치켜세우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구박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가 진행된 사회가 다르니 결과도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공부하는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는 착하게만 살아." 이렇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좋다. 쓸데없이 무시받지 않고, 직업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이성을 만나고 심지어 결혼을 할 때도 따진다. 다만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사회에 나가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 하면 평균 이상의 삶을 살 가능성은 월등히 높다. 그러나 정서지능(EQ)이 높으면 책임감과 동정심이 강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정서 표현을 적절히 하여 타인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서지능이 낮으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본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자녀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는 아이를 죄인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엄마 나 오늘 배가 아픈데 좀 일찍 잘게요.」

「어이구.. 아프긴 뭐가 아파! 공부하기 싫으니깐 그러는 거지!」


「엄마 최선을 다 했는데요 생각보다 시험을 너무 못 봤어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허구한 날 책상에 앉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 더니.. 아 몰라! 꼴도 보기 싫어 나가!」


  어른들이 보기엔 변명에 불과하더라도 아이 입장에서는 그 나름대로 진실일 수가 있다. 몸이 아픈 아이는 꾀병일 수도 있지만 일단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대처해야 한다. 시험을 망쳐서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의 경우 지나간 시험에 대해서는 크게 나무라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실망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달래 주는 것이 먼저고, 다음 시험에 대한 준비는 그 후에 하는 것이 맞다. 아이는 여러 면에서 미완성이다. 부모의 지혜로운 훈육이 필요하다. 이렇게 EQ는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우리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서지능의 기초가 폭발적으로 형성되는 첫 번째 시기는 생후 초기인 0세부터 3세까지라는 것이 일반화된 이론이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정서 기초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아이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뇌의 정서 학습 중추가 손상을 입는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새로운 정서 학습 경험에 의해서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지만 생의 초기 학습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영아는 자신을 돌보아 주는 양육자와 되풀이하여 접촉하는 동안 양육자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이 영아기에 어머니로부터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나누지 못하면 아이는 정서지능 발달이 결정적으로 저해되며 그 영향은 사춘기 이후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문제는 공부를 잘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반드시 문제를 드러낸다. 서울대학교에 들어오는 수재들도 이러한 문제를 토로한다. 이를테면 소속 학과나 동아리 안에서 적응 문제와 학업 진로 문제, 교우 관계, 이성 관계 그리고 우울함이나 정서 불안 또는 성격상의 문제 등을 토로한다. 많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친구가 없다. 외롭다, 대학에 사람들은 많은데 정말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이 없다.'라는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고 적절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좋은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를 모르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이러한 문제는 초중고 학생 시절 또래와의 소중한 놀이 시간조차 공부 시간으로 빼앗긴 영향이다. 오늘날 학생들은 학교에 갔다 오는 즉시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해야 잔소리를 안 듣는다. 집과 학교 밖에 모르는 아이를 선호하는 것이다. 사회의 어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 아이에게 정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당연히 정서지능은 향상될 리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에 면죄부를 주는 교육 체제이다.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그 사실이 대견해서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다. 설거지, 청소는 차치하고라도 자기 방 청소도 타인이  대신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EQ라는 것은 개개인 나름의 체험을 통해 습득된다는 사실이다. 


  정서지능은 실제 삶 속에서 부딪혀 오는 느낌과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대부분 자녀가 IQ가 높고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도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혼자 해도 되지만 사회에 나가면 다른 사람과 같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기에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는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 당연히 그러한 체험이 없이 지식 암기 공부만을 한 아이들은 올바른 느낌과 정서가 습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우리 주위에 있는 자기밖에 모르는 동료나 상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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