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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Feb 08. 2016

29 시험은 과연 공정할까?

시험 잘 보는 법

  얼마 전에 용산에서 캠코더를 샀다. 늘 그렇지만 물건을 사러 가면 원래 사려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입문자용 캠코더를 생각했는데 더 좋은 물건을 직접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결국 더 좋은 성능의 중고 제품을 구매했다. 문제는 캠코더의 화면에 나오는 글씨가 일본어였다. 이것 때문에 더 싸게 사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다루기 까다로웠다. 일단 일본어에 있는 한자만 알아도 대충 무슨 기능인지 파악할 수 있기에 한자에 능통한 아버지에게 SOS를 쳤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한자의 음과 뜻을 거의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나는 한자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한국 어문회에서 주관하는 2급을. 한국 어문회는 한자 능력검정시험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 반면에 아버지는 한자 자격증이 없다. 그저 평소에 늘 한자를 쓰고 공부를 할 뿐이었다. 한자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으시단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한자 자격증을 따자 아버지도 시험을 보러 가셨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평소에 늘 공부를 해서 한자 실력이 출중한 아버지는 떨어지고, 시험 보기 전 몇 달 동안 급조한 나는 합격한 것이다. 


  시험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은 미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시험의 당락은 천당과 지옥을 방불케 한다. 학교에서 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중학교・고등학교 입학시험, 수학능력시험, 편입 시험, 대기업 적성고사, 토익 시험, 공무원 시험, 대학원 졸업 고사, 승진 시험 등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시험은 인생의 동반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위험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과연 시험이 한 인간의 능력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도구이기는 한 걸까?


  가령 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한 학생이 불합격한 학생보다 더 경영에 적합한 학생일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불합격한 학생보다 공직에 더 적합한 인재일까? 토익시험이 과연 그 사람의 영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 한 마디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문제가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라는 제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나마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생긴 사람, 키 큰사람, 부모를 잘 만난 사람이 붙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떨어진다면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대학교 몇몇 학과에서는 실력보다 외모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논란이 있어서 실기시험에서 블라인드를 친다고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복면가왕에서 목소리만 듣고 선택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험이 과연 정말로 공정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대입 시험인 수학능력시험을 창시한 교육과정평가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엄격하게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비슷하게나마 측정하는 것도 어렵다. 오차를 줄여야 원래 측정하고자 하는 것에 가까워지는데 이게 힘들다. 그래서 시험 점수에서 어느 정도 측정 오차는 불가피한데 이 오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예컨대 80점 받은 학생과 90점 받은 학생의 능력이 실제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없다."


  수능을 만든 사람은 수능 점수가 그 사람의 실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점도 가르지 않은가. 88점은 2등급. 87점은 3등급. 87점으로 3등급을 받아 원하는 대학에 아쉽게 떨어진 학생은 사교육의 도움으로 재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대한민국에서 사교육이 없어질 수가 없다. 어떻게든 1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안 간 힘을 쓴다. 그래야 인생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니깐 말이다. 


  어떻게 보면 시험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 시험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사회가 문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외국에서는 학생을 시험 성적으로만 선발하지 않는다. 시험 성적은 참고하고 그 학생의 봉사정신, 독서이력, 동아리 활동, 스포츠 활동 등도 평가에 포함한다. 즉 학생이 우리 대학교를 나와서 정말로 사회에 도움이 될 학생인지 판단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수능 SAT 만점자가 의대에서 떨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학생은 주변의 어렵고 힘든 지인들을 돌보지 않고 본인의 공부만 했던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경험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본인의 돈벌이에만 집중한다는 것을 대학은 알고 있다. 반면에 수능 SAT는 몇 개 틀렸더라도 봉사활동 시간이 많은 학생을 선발한다. 내가 공부하기에도 부족한 중고등학생일 때 고아원에 가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한 학생은 앞으로도 이타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훌륭한 제도가 한국으로 들어오면 이상하게 변한다. 학생들의 봉사, 독서, 동아리 활동도 관리해주는 학원이 생겨나고 반드시 합격하는 자기소개서를 써 준다면 고액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전직 유명 대학교의 입학사정관이었다면 입시 컨설팅에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챙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있는 집에서는 봉사, 독서, 동아리 활동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이 수월한 반면, 없는 집에서는 빠듯한 삶림에 학원도 보내야 하고 비교과 활동을 위해 추가 금액이 들어가는 것이 버겁다. 공평한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학생을 일정 비율로 뽑는 지역균형 선발제도를 만들었지만 역차별이라며 논쟁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전형으로 들어간 아이도 지균충이라며 놀림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역시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들여와도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외국의 한 교수 부부가 자녀의 공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엄마 아빠는 이렇게 공부를  잘했는데 얘는 왜 공부를 못 하지?」


  실제로 주위에서 보면 의사, 교수, CEO 자녀들 중에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어쨌든 그 교수는 다행히 '심화'나 '선행'같은 처방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자녀를 관찰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가 우리를 닮았다면 분명 머리는 좋을 텐데.... 하지만 시험을 잘 보는 것은 이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그리고 위험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팀은 학생들의 DNA와 성적의 데이터를 수집해서 과연 시험을 잘 보는 DNA가 정해져 있는지 분석했다. 이 연구는 시작 단계부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연구 결과가 충격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언론의 압박에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시험을 잘 보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똑같이 해서 비슷한  지식수준을 가져도 막상 시험을 치르면 상이하게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험과 같은 긴장 상태가 되면 머리가 하얘지는 DNA가 있고,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는 DNA가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암기력도 좋은 학생이 시험만 보면 실망스러운 경우, 이 DNA가 한 원인일 수 있다.


  어쨌거나 타고난 DNA는 바뀔 수 없는 법 아닌가?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낸 것은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보는 시험과 유사한 형태로 학원에서 모의시험을 미리 쳐 본다. 그런데 학원에 다니려면 돈이 든다. 나아가 학교 시험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앞으로 나올 문제를 유추한 모의고사를 풀려보면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러면 더 유능한 강사가 필요하고 더 비싼 학원비도 기꺼이 낸다. 이렇게 시험을 통해서 선발하면 있는 집 자식이 대체로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수능인 SAT의 경우도 부모의 경제적 수준과 자녀의 시험 성적이 거의 정비례한다. 그래서 미국은 현재 시험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2014년에는 5%의 학생이, 2015년에는 20%의 학생이 시험을 거부했다. 약 22만 명의 학생이 학교 시험을 치지 않은 것이다.

 

  세계의 많은 교육자들이 점점 하나의 시험으로 누군가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시험 점수 1~2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설사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지 않은가? 만약 한 학생이 시험을 거부한다면?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사회적 낙오자가 되기 쉽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시험을 봐야 한다. 그리고 잘 보면 더 좋다. 

  

  그럼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시험마다 특성이 있다. 이 특성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각 시험에서 묻고자 하는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을 공부하면 된다. 예컨대 한자 능력 검정시험에서 나는 어떤 한자가 시험에 나오는지에 큰 관심을 가졌고, 나의 아버지는 시험에 무엇이 나오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그저 좋아해서 한자를 공부했을 뿐이다. 나는 시험에 나오는 한자를 시험에 나오는 유형으로 몇 달간  파고들었고 아버지는 본인의 방식대로 한자를 음미하면서 즐겼다. 합격여부의 관점으로만 봤을 때 아버지는 헛 공부를 한 셈이다. 나는 한자 자격증을 땄지만 아버지는 자격증이 없다. 나는 한자 실력이 없지만 아버지는 한자 실력이 출중하다. 시험의 합격 여부에 큰 가치를 두는 대한민국에는 이렇게 나처럼 실력 없이 자격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넘쳤나고 있다. 


  정리하면, 많은 사람이 시험은 한 사람의 능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험을 만든 사람은 그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시험은 누군가의 능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80점과 82점은 사실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칼 같이 구분한다. 그래서 시험 점수 1점을 더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요구하는 것만 공부하면 된다. 기출 문제를 풀어보고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만 기계적으로 공부하면 시험은 잘 볼 수 있다. 이렇게 시험 점수의 1점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제도는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 모습을 나중에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적어도  지금처럼 여전히 시험 점수 1점에 목매는 상황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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