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는 어떤 아이들이 경쟁력을 가질까?
아기는 태어나면서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따라 배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은 생존을 위한 기술을 양육자를 보고 학습해야 한다. 이는 본능적이기도 하다. 나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새는 새가 아니고, 달리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치타는 치타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을 배워야 할까? 인간은 어려서는 움직이고 말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커서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익힌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룰을 익혀야 하고 직장에 가면 업무를 배워야 한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로서 역할을 익혀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어머니 아버지로서 역할도 배워야 한다. 은퇴하면 어떻게 살아갈지도 배워야 하고 요즘은 '잘 죽는 법'이라는 강의도 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배움과 교육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무언가를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릴 적 피아노나 태권도를 배웠던 것을 떠올려보자. 피아노는 음표를 보고 이에 맞는 건반을 두드리는 활동이다. 그런데 눈이 음표를 인지하고 뇌가 손가락에 신호를 보내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지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공중에 발을 차는 태권도 동작도 무수히 많은 훈련을 통해서 더 부드럽게, 더 절도 있게, 더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골프에서 공을 멀리 치기 위해서는 어깨에 힘을 빼야 하는데 이 과정이 2년이 걸린단다. 권투를 할 때도 힘을 빼고 쳐야 파워가 더 세지는 데 직접 해보니 2~3년 정도 열심히 훈련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은 학습이 빠른 동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무언가를 천천히 배우는 인간의 특성이 농경사회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거들면서 보고 배울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조금 총명하고 조금 부족한 것이 그리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다 본인의 역할을 해 냈다. 그리고 농경사회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시스템이었다. 세상에서 그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르쳤기 때문에 개인의 특성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서서히 탈락자들이 생겼다. 산업 사회에서는 규격화된 일꾼이 필요했다. 개인의 특성을 다 따지면 전체 작업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산업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공장이다. 정형화된 제품을 저비용 고효율로 얼마나 많이 생산해 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효율성이라는 단어 앞에 무참히 짓밟혔다. 공장에서는 작업자의 말을 알아듣고 수치를 계산하면서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언어'와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장소를 우리는 학교라고 불렀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적 의미의 학교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중세 서양의 학교는 종교의 교리를 배우는 장소였다. 이때 우리나라 서당에서는 양반 자제분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이 때는 글을 배우고 싶어도 양반이 아니면 배울 수가 없었다. 간혹 평민 자녀가 한자에 관심을 가지면 쓸데없는데 관심을 가진다며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공식 하나.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예전에는 평민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허리가 휘도록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엄니! 저도 공부할래유! 왜 옆 동네 민석이는 공부하고 저는 왜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나유!」
「인석아! 그럼 못써! 네가 어찌 양반들 하는 공부를 하겠다고... 큰일 날 소리 하덜 말아!」
사실 공부 자체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공자님도 말하지 않았는가?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어려서부터 하도 공부 공부하면서 강제로 시키고 못 한다고 구박하고 옆 친구하고 비교하니깐 공부에 염증을 내고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젊을 때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가정 형편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고등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우리 아이도 어려서부터 공부는 절대 하지 못하게 하고 일을 시키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다.
어쨌든 산업 사회에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어느 정도 설명은 듣고 기계의 수치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소한의 언어와 수학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다.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지만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책들이 산업 사회의 효율성을 지지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어 주었다. '분업'을 통해서 개개인마다 작은 영역을 숙달시키면 전체 생산이 좋아지고 나라의 부가 증가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부자가 되고 싶은 기업가들은 열광했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밤낮으로 성실하게 일하면 밥은 먹고살 수 있는 사회였다.
산업 혁명으로 촉발된 기술 개발의 덕분에 사회의 발달 속도가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세계의 큰 전쟁이 두 번 일어났다. 전쟁은 매우 잔인하지만 인간의 과학기술을 극단치로 올려놓는 장점(?) 도 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국은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군인들은 총칼로 피를 흘리며 싸웠고, 과학자들도 연구실에서 땀 흘리며 무기를 개발했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한 나라가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그 발달된 무기의 기술력들이 우리 삶으로 파고들었다. 개발하고 안 쓰면 아까우니깐...
그중에 두 가지가 우리를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이끌고 왔다.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소비자의 수요에 힘입어 기업이 만들어서 공급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 차려보니 그런 물건이 세상에 나왔고 사람들이 그 물건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의 발전 속도가 인간이 무언가를 습득하는 속도를 급속도로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낙오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세대 간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기성세대는 신문을 보고 젊은 세대는 인터넷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다른 매체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살게 된 것이다. 이 역시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물건들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물건을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다. 이러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본인들이 잘 나서 돈을 많이 벌은 줄 알겠지만 시대를 잘 만난 것이다. 도박, 술, 사기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피하면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었고, 전쟁 덕분에 발달된 기술과 맞물려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때는 품질 좋은 물건을 싸게 내놓아도 팔리지가 않아서 망하는 회사가 속출한다. 물건이 부족했던 시기에 성공을 거두었던 노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게으르고 열정이 부족하다고 호통을 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이는 다른 시대를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냉정히 평가해보자. 아직도 과거 산업화 시대에 필요한 일꾼을 길러내는 시스템이다. 학교에서 언어(국어와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조금 더 외우는지 못 외우는지로 그 아이의 미래를 규정지어 버린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가 우리나라의 교육을 보고 공장에서 물건을 찍듯이 아이들을 찍어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미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배움의 다양성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교과서적인 처방을 하고 떠났다. 이후 우리나라는 그의 말대로 (물론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한 것은 아니지만) 획일적인 수능에서 학생의 다양한 관심 분야를 발굴해 이를 대입에 반영하는 수시를 확대했다. 그러나 수시도 금수저 논란에 휩싸이며 앞으로 교육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들 바꿔야 하는 것은 동의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러한 형국에서도 내 아이를 조금이라도 나은 학벌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여태껏 대한민국에서 공부하고 살아온 평범한 시민으로서 그 마음을 120%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진정 내 아이를 생각한다면, 내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미래에 내 아이가 이력서를 3년째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필살기' 하나쯤은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떨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필살기는 '예체능'이다. 운동은 꽤 오래 해오고 있고, 최근에 피아노를 배우면서 드는 생각이 공부와 예체능이 관련이 많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서 음악을 오래 공부해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공부를 할 때와 운동이나 피아노를 칠 때 사용하는 뇌의 부위가 다르다. 앞으로 융합적으로 사고하는 인재가 필요한 사회에서 예술적 감각이 뒷받침되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 분야의 리더로 성장할 것이다. 다만 공부를 등한시하고 예체능만 시키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정리하면, 지금 우리의 교육은 미래 사회에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려면 제도권 밖의 교육은 매우 험난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날 수도 없다. 학벌도 국내에서는 그 파괴력이 꽤 큰 편이므로 포기하기도 어렵다. 다만 고등학교는 힘들더라도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8~9년 정도 아이의 예체능에 투자(?)하자. 1~2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적어도 5년 이상 한 분야를 파야지 깊이가 생기는 법이다. 투자 수익률(?)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남과는 다른 내 아이의 특기를 하나 만들어준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자. 미래에 어디 가서도 인정받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내 아이의 모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