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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May 16. 2016

40 상대평가 vs. 절대평가

너 몇 등이니?

  박근혜정부가 초기 추진했던 '대입 전형 간소화'정책이 있다. 복잡한 수시의 전형방법을 4개로 단순화하는 것이 정책의 골자였다.


학생부 교과, 학생부 종합, 논술, 특기자


  시작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이는 박근혜정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전부터 많은 교육관련 종사자들의 주장하던 바였다. 대입 전형이 자주 바뀌고, 복잡하게 만들어놔서 대학입학원서를 낼려면 비싼 컨설팅료를 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사교육을 유발하는 수능을 줄이고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서 내신시험을 대입에 적극 반영하는 수시를 늘리자는 것이다. 어쨌든 미래 사회는 여러 분야의 능력을 가진 인재를 필요로 하니 획일적인 수능이 아니라 독서, 동아리, 봉사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는 수시 전형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듯 했다.


  그러나 막상 정책을 시행해보니 사교육이 전혀 줄지 않았고 수능의 사교육이 내신으로 옮겨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리, 독서, 봉사활동을 관리해주는 종합 컨설팅 학원이 생겨났다. 매번 내신 시험이 피말리는 경쟁이 되었다. 특정 학교의 내신 대비만 전문으로 하는 고액 대비반이 생겼다. 시험에 나올 문제를 찍어준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있었다. '쪽찝게 과외'의 2016년 버전이다. 실제로 찍어준 문제에서 70%가 똑같이 시험에 출제되었다. 어떻게 그런일이? 내신시험은 범위가 있어서 출제 가능한 문제를 모조리 만들어보면 평범한 강사라도 그정도 적중률은 나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전교생이 그 선생의 시험대비 수업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학교 수업 시간은 졸아도 그 학원 강사의 수업시간 눈에 불을 켜고 듣는다. 모두 들으니 나만 안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수강료도 부르는 게 값이다. 소설속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이 내신이 치열한 고등학교에서는 친구에게 노트를 빌려주는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시험은 '상대평가'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서, 내 노트를 빌려간 친구가 열심히 공부 해서 시험을 잘 보면 내 등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도 노트를 빌려주기를 꺼려하는 아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입의 축이 수능에서 내신으로 이동하면서 내신 1점의 파괴력이 커져버렸다. 매번 내신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대학 입학의 문이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말 그대로 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이게 나라에서 말하는 '창의융합형'인재를 기르는 방식인가? 아니면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탁상공론의 폐해인가? 


□ 교육부는 ‘15. 9. 23.() 현 정부의 ‘6대 교육개혁 과제’의 하나인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핵심과제로서,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2015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발표하였다. 


-“지식 위주의 암기식 교육”에서 “배움을 즐기는 행복교육”으로 전환 -

-핵심개념․원리 중심으로 학습내용 적정화, 학생 중심 교실수업 개선- 

-통합사회․통합과학 등 공통 과목 신설을 통해 문․이과 통합교육 기반 마련-

-국가직무능력표준(NCS) 토대로 산업현장 직무중심의 직업교육체제 구축-

                                                                                                교육부 홈페이지 보도자료에서 발췌



  국정 운영을 희화할 생각은 없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한 분들이 공직에 진출하고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섭외해서 치열한 논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 현장의 실상을 알고는 있는데 딱히 해결책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실상을 모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거의 1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는 시간에 좀더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일종의 자기만족? 머 그런 것이었다.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버라이어티한 일들과 대학원에서 배운 이론들을 접목시키는 과정은 힘겨웠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브런치북 프로젝트 #2에서 예상치 못하게 수상을 하게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먼저 말할까 고민하다가 브런치에 처음 글을 올릴 때부터 응원해준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축하한다는 말 뒤에 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몇 등 했는데?」


  나는 반문했다. 


  「야. 그게 중요하냐?」

  「아니 그래도... 궁금하잖아~」


  '1등을 하면 더 많이 축하해주고, 3등을 하면 조금 축하해줄 것이었나?'나는 속으로 빈정이 상했다. 머 내 친구의 잘못은 없다. 나라도 그게 궁금했을 테니깐... 다만 내가 수상을 한 것에 대해서 배아파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으로 생각하고 처음 건 전화에서 그 질문을 받아서 속상할 뿐이었다. 역시 가족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주무시고 계셔서 (또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아서 다음 브런치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실 것 같았다.) 누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무슨 상 탔는데?」

  「.....」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왜 우리는 그렇게 등수에 집착할까? 물론 등수가 중요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 친구들을 만나보면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각보다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 친구들도 등수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하지만 등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의 노고도 인정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공감을 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금메달을 따면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하고, 은메달을 따면 패배자로 바라본다. 이런 우리나라의 1등 지상주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학창시절의 '상대평가'가 그 첫단추 였을 것이다. OECD국가 중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우리는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서 1등 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고 등수를 매기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한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깐 그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일까? 


  공부의 목적이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폐허가 된 나라에서 빨리 일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방법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저 나라를 이기는 것이 목표다!' 이런 식으로 국민들을 한껏 고양시키면 빨리빨리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국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 나라가 국민의 행복, 우리의 정체성, 나아갈 비전 등을 얘기한다는 것도 우습다. 그렇게 1등만이 인정받는 풍토가 우리의 DNA 깊은 곳에 서서히 파고 들었던 것은 아닐지...


  2018년 수능부터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다. 아마 학원에서 일하고 있는 전국의 영어 강사 중에서 유일하게 슬퍼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였을 것이다.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뀌면 학원의 영어 강사 역할이 축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해 관계가 얽힌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을 해 왔던가. 개인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그게 올바른 길이라면 그 길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학원에서 짤리면? 사회가 더 이상 내 직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쿨하게 인정하고 바뀐 사회에서 새 인상을 시작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열심히 노력하면 밥은 먹고 사니깐.


  수능에서 국사와 영어가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되고 내년에 첫 시험이 치뤄질 것이다. 절대평가란 제도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교육부에서는 국어와 수학의 절대평가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국사와 영어를 절대평가로 해 보고 큰 문제가 없으면 국어와 수학도 절대평가로 가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수능의 절대평가가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나면 절대평가의 칼날?은 내신을 향할 것이다. 물론 각 학교의 특수성이 있는 만큼 내신의 절대평가는 국가가 관리하는 수능 만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신 지옥의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절대평가의 도입에 대해서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취지는 좋은데 우리 현실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서히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 상대평가에 대해서 지친 국민들이 이제 우리의 시스템을 의심하고 바꿀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곪을대로 곪아버린 상대평가의 고름을 절대평가가 씻어내기를 바란다. 물론 절대평가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험 문제를 쉽게 내버려서 대다수가 100점을 받는 웃지못할 헤프닝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상대평가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상대평가의 지옥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수능과 내신에서 절대평가의 제도를 다듬어서 정착시킨다면 아이들은 이제 이런 말을 못 들을 것이다.


  「너 몇 등이냐?」


  대신 이런 말을 하고 들을 것이다.


  「너 이거 알아?」

  「나 이거 모르겠는데, 알려줄래?」

  「이거는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는 거야~」

  「아하! 고마워~」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 이게 공부의 전부가 아닐까?


  정리하면, 우리는 시험을 보고 등수를 매기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공부는 당연히 옆 친구와 경쟁을 하는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심각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부분적으로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늦었지만 옳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절대평가가 정착되는 과정은 평탄하지 만은 아닐 것이다. 모쪼록 많은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처럼 남을 이기기위한 공부가 아니라 본인이 부족한 것을 알아가는 공부를 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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