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를 아시나요?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은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을 뒤로 미룬다. 택시는 무료로 학생들을 수험장까지 태워준다. 심지어 늦잠 잔 아이들을 위해서 퀵 서비스 오토바이로 아이들을 날라주는 진풍경도 구경할 수 있다. 이날만큼은 내 아이 네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이 온전히 입실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배려해준다. 영어 듣기 시간에는 근처 공항의 비행기 이착륙도 조절한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지만 외국에서 보기에는 신기한 모양인지 다른 나라에서 해외 토픽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우리는 공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다. 이 유별난 교육열을 빼놓고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단숨에 세계 20위 권으로 올라온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영토도, 자원도 가지지 못한 반쪽짜리 나라에서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온 국민이 교육에 미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자부심에 날개를 달아준 시험이 생겼다.
피사(PISA, 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는 번역하면 국제학업성취도평가 쯤 된다. 물리학을 전공한 안드레아스 슐라이허와 독일 최고의 명문인 함부르크대학의 팀이 개발한 시험이다. 이전의 시험들은 배운 것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평가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피사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필요한 고도의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미래 사회의 인재상은 배운 것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피사는 각 나라마다 미래 사회에 대비해 교육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고마운 시험이다.
피사는 전 세계 약 70여 개국이 참가한다. 3년에 한 번씩 만 15세,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무 교육이 중학교까지 이므로 중3~고1 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을 평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9년에 157개 학교에서 약 5,000명이 참여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가장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자료를 수집한 교육연구이다. 연구 결과 독일에서 만든 시험이지만 독일의 결과가 매우 실망스럽게 나올 정도로 객관성과 신뢰성이 보장된(?) 시험이다. 이 시험의 최대 수혜자는 두 나라인 것 같았다. 대한민국과 핀란드. PISA 시험을 치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뉴스가 언론을 도배한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에서 OECD 34개 회원국 중 읽기 1~2위, 수학 1~2위, 과학 2~4위로 최상위의 성취 수준을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향신문 2010. 12.7>
TV만 틀면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종합적으로 세계 2등을 했다, 수학은 부동의 세계 1위이다 라는 식의 뉴스가 나온다. 우리 앞에는 늘 핀란드가 있었다. 그래서 핀란드는 어떻게 교육하고 있나 확인하러 떠나는 연수가 줄을 이었다. 가서 보니 우리와 너무도 달랐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영어를 단 한 번의 시험도 보지 않았다. 영어 시간에 친구와 주사위 게임을 하면서 말하기 듣기 훈련을 하고 고학년이 돼서는 영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시험이나 평가는 없었다. 졸업 후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상적으로 영어를 말하고 듣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핀란드식 교육을 들여와야 한다며 몇몇 사람들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와 너무 달라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용할지 엄두가 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PISA, 대한민국 세계 1~2등, 핀란드가 연관 검색어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고, 미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 나라들보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똑똑하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특히 일본보다 높다는 사실에 통쾌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책에서 머리털이 쭈뼛서는 내용을 읽었다. PISA의 시험 결과 보고서가 300쪽짜리 책 6권이라는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지?' 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럼 우리가 맨날 말하는 대한민국 세계 1~2등은 그중에 한 장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이 생각이 다시 의심을 품었다. '그럼 나머지 보고서에는 무슨 내용이 쓰여있는 것일까?' 그리고 PISA에 관한 자료들을 조사하고 분석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한민국이 종합 2등이라는 뉴스는 진실을 감추는 교묘한 전략이다. OECD에서 유일하게 상대평가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다른 나라는 상대평가의 개념 자체가 없다. 시험을 보고 등수를 매긴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시험을 왜 볼까? 말 그대로 본인의 학업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A를 맞으면 그 과목에 대한 공부를 충실히 한 것이다. C를 맞으면 그 과목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 뿐이다. 피사도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시험이다. 피사 홈페이지에 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PISA는 15세 학생이 미래에 필요로 하는 것들에 중점을 두고서 배운 것을 평가하고자 한다. PISA는 학생의 지식을 평가하지만, 또한 그 지식과 경험을 실제 세계에 적용하고, 지식과 경험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도 평가한다.
예컨대, 읽기, 수학, 과학에서 아래처럼 1등급부터 6등급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5~6등급은 앞으로 '지식 생산자'의 역할을 할 사람, 3~4등급은 '지식 소비자'의 역할을 할 사람, 1~2등급은 지식정보 상품을 소비할 수 없는 '잉여인간'이라고 친절하게(?) 분류하고 있다. 즉 5~6등급은 미래에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고, 3~4등급은 콘텐츠를 만들어 낼 역량은 없지만, 그 콘텐츠를 소비할 능력은 있는 사람, 1~2등급은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예컨대 스마트 폰과 인터넷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에 1~2등급으로 편입된다고 볼 수 있다.
1등급 : 주어진 자료에서 단순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2등급 : 주어진 자료에서 복합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3등급 : 자료를 해석할 수 있다.
4등급 : 자료를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다.
5등급 : 자료를 비판적, 성찰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6등급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할 연구 전략을 짤 수 있다.
그리고 각 국가마다 1등급에서 6등급의 아이들이 각각 몇 % 인지 알려준다. 이를 토대로 각 국가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혹시 문제가 있으면 보완하자는 것이 피사의 취지이다. 결과를 요약하면 미래의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대한민국의 5~6등급 학생 비율은 약 5% 정도이다. 핀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영국, 프랑스 등의 5~6등급 학생 비율은 약 15% 정도이다. 홍콩, 일본, 아일랜드, 스웨덴, 벨기에,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미국, 체코 등의 5~6등급 학생 비율은 약 10% 정도이다.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5~6등급 학생이 5% 정도 더 많다. 인구 비율로 계산하면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인 것이다. 피사에 따르면 대다수 우리 아이들은 미래의 지식 생산자가 아니라 지식 소비자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종합 2위라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나라가 5~6등급 아이들은 적지만, 1~2등급 아이들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서 평균을 내면 점수가 확 올라간 착시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우리가 언론에서 뉴스에서 보고 들었던 그 기사이다.
착각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학창 시절 추억은 못 만들어주지만 그만큼 공부를 시켜서 미래에는 나은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육이 아니라 자원, 국력, 정치 때문에 우리가 더 발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미래에 경쟁력을 갖춘 아이들을 길러내지 못한다고 피사 결과는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3~4등급에 약 70%가 몰려있었다. 즉 선진국의 똑똑한 아이들이 물건을 개발하면 딱 그걸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회사 CEO가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것이다.
"신제품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한국에 출시합니다. 한국의 역동적인 트렌드와 깐깐한 소비성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인색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개발할 테니 너희들은 그걸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미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하고 스스로에 능력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직 국가 간 순위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진실을 감추고 물타기를 한 교묘한 평균점수로. 불행 중 다행은 이 치열한 주입식 교육의 결과 낮은 1~2등급 아이들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즉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은 하위권 아이들을 중위권 아이로 만드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지만, 상위권 아이들을 길러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상위권은 전 세계 아이들과 경쟁했을 때 상위권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왜 뉴스에서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질문을 바꿔보자. 왜 뉴스에서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 걸까? 전문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말하면 대한민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결과니깐. 문제가 있으면? 국민들은 해답을 찾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본인 임기 내에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데 교육은 성과를 확인하려면 적어도 5~10년은 걸린다. 그래서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못하고 '대한민국 세계 2등'이라는 문구로 뉴스를 도배하기 바빴던 것이다.
정리하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피사 시험의 결과를 보고 흐뭇해했었다. 역시 우리 민족은 DNA가 우월하다는 식의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피사 시험의 결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별로 없지만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도 마찬가지로 별로 없었다. 반대로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영리한 아이들을 많은 만큼 기초 학력이 부진한 아이들도 많았다. 정답은 없다. 다만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해결책은 지금 우리의 주입식 교육에 유능한 아이를 따로 특별 교육을 해야 하는데 차별과 공정성 논란에 휘말릴 것이다. 역시나 문제는 알지만 딱히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래서 정부에서도 '대한민국 세계 2등'이라는 구호로 적당히 넘어가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