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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Feb 23. 2017

54 합리적인 사고방식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붕괴 사고로 인해서 터널에 갖혔다고 생각해보자. 안타깝게도 하정우같은 매너남은 없었다. 대신 굶주린 생존자 4명(A는 80Kg, B는 70Kg, C는 60Kg, 그리고 나)이 모였다. 찾아보니 빵 한 덩어리가 있았다. 여기서 빵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1번안 : 4분의 1로 균일하게 등분한다.

2번안 : 몸무게에 비례해서 나눈다.


  사실 정답은 없다. 1번은 빨갱이라고, 2번은 차별을 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빵을 나누는 것이야 까짓거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우리 삶의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집에 두 명의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첫째는 공부를 싫어하고 관심도 없다. 반면에 둘째는 공부에 욕심이 있고 열심히 한다. 이 가정의 사교육비는 총 100만원이 책정되어 있다. 이 때 당신이라면 사교육비 100만원을 어떻게 배분하겠습니까?


1번안 : 1인당 50만원씩

2번안 : 첫째는 어차피 공부를 안 하니깐 30만원 / 둘째는 공부를 열심히 하니깐 70만원

3번안 : 첫째는 공부를 힘들어 하니깐 더 열심히 하라고 70만원 / 둘째는 공부를 알아서 잘 하니깐 30만원


  마찬가지로 정답은 없다. 다만 각각의 선택에 따른 다른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다. 아는 지인의 부모님은 2번안으로 밀어붙였다. 첫째는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도 다녀왔다. 둘째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셋째는 전문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편찮으시자 생각지도 않았던 유산문제가 터졌다.


「형은 대학교도 졸업하고 유학도 다녀왔잖아? 그런데 유산도 더 많이 가지겠다고?」

「부모님 용돈도 내가 제일 많이 드리고 제사도 다 내가 지내잖아. 내가 그 정도 권리도 없냐?」

「오빤 참 양심도 없으셔.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 오빠가 딱 유학가는 바람에 4년제 못가고 전문대 갔잖아! 」

「야 말은 바로 하자.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니가 전문대 간건 성적 때문이지 학비 때문이냐?」


  집집마다 가풍이 다르니 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보자. 학교는 이런 문제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학교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심화반'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반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별도로 마련된 쾌적한 자습실에서 공부도 하고 선생님에게 질문할 기회도 더 많다. 요즘 뜨거운 감자인 학종 비교과 관리도 선생님들이 더 신경써서 관리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심화반은 과연 합리적일까?


  어차피 한정된 자원(선생님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보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더 많이 분배하는 것이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기에는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특별관리를 받은 아이들 중 몇몇이 명문대에 진학을 하면 그 학교는 흔히 명문고가 된다. 하지만 이를 결과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교육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사실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힘든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의 관심과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하려는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의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오늘도 공부를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대로 학습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아이들의 학습에 대한 수요는 결국 사교육 시장에서 표출된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과 학교에서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해결방식은 개개인의 사고방식에 깊게 뿌리 내린다. 결국 이러한 관행에 무감각해져 버린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특혜를 받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이 생기는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 까지 우리는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못하고 그 안에서 혜택을 받는 그룹으로 가기위한 피말리는 경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은 학종의 영향으로 조별과제가 많다. 수업을 통한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예컨대 4명이 한 조가 되어서 조별 과제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각자 역할을 어떻게 배분할까? 학습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자료 준비에서부터 발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상대적으로 자료 준비, 발표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무임승차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핀잔을 듣지만 가만히 있어도 잘하는 아이들이 열심히 해서 조별로 받은 좋은 점수를 공유하니 그 정도 굴욕은 참아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떨 때는 선생님이 나서서 이러한 분배를 권장(?)한다는 것이다. 


「어머. 이 조에 예슬이가 있니? 너희들 점수 잘 받고 싶으면 쟤한테는 아무 것도 시키지 말고 너희들 끼리 해라! 알았지?」


  모든 팀원들이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짐이 되는 사람은 배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배워왔으니깐.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몇몇 나라에서는 비록 더 나은 결과를 받지 못해도 발표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에게 발표를 시킨다. 그들이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만약 발표를 잘 하는 사람이 모든 발표를 도맡아서 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발표 훈련을 언제 하죠?」


  그러다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억울하지 않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결과보다 과정에서의 공정성 더 중요하다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결과보다는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사회의 각박함이 문제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라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조용히 울려퍼지고 있다. 교육은 어떤 인간을 만들지에 대한 그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된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출발점은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교육현장이어야 한다.


  정리하면,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에서의 문제는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보면 웬만하면 넘어갔다. 더 빨리 더 싸게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눈물을 외면했다. 대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 중소기업을 절망적으로 쥐어짰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방치했다. 그러나 이 방법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그때는 몰랐다. 100명 중에서 99명을 패배자로 만들고 살아남은 1명도 삐딱한 인간으로 된다는 사실을. 갑질이 만연한 사회의 저변에는 차별을 하고 받는 것에 익숙한 교실이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쳐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교육현장이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믿고 있었던 그 방법이 과연 공정한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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