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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 ‘조커: 폴리 아 되’의 평점이 낮은 것을 보고 꽤 놀랐다. 이번 영화는 1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조커'의 후속작인데다 원작 팬들이 환호하는 할리 퀸과의 이야기가 포함되었다. 그런 기대작이 평점이 낮다는 건 내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전작인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받았던 억압과 차별에 난 충분히 공감했다. 영화를 보면서 난 아서의 삶에 들어가 그의 아픔과 함께했다. 정도는 다르지만 나 또한 나를 향하는 것만 같은 야릇한 차별과 소외에 분개하기도 비열한 농담에 시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조커처럼 그들에게 복수하지 못하기에 조커의 살인에 쾌감을 얻었다. 내게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 조커가 대신해 마구 혼내준 것 같았다.
이번 작에서 나는 기대했다. 아서 플렉이 다시 조커가 되어 그를 모욕하는 하비 덴트를 총으로 쏘기를 바랐다. 그에게 잘난 체하며 설교를 늘어놓는 판사가 다시는 입을 놀릴 수 없을 때까지 피가 흥건하게 때려줬으면 했다. 조커를 응원했던 법정의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그들은 곧 나였다. 그가 조커가 되어 법정에 나타났을 때 난 그들과 함께 환호했다. 어눌하고 주눅 든 아서 플렉과는 반대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조크를 날리는 조커의 모습은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알고는 있었다. 리도 알았다. 적어도 법정에서 만큼은 아서 플렉으로 남았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사형이 구형된 법정에서 머레이를 죽인 분장을 하고 다시 나타난 것은 아서 플렉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서를 사랑했다면 법정의 조커를 반길 수 없다.
아서 플렉은 조커가 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반겨주는 사람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를 원했다. 리를 사랑했던 조커는 기대에 부응하기로 한다. 그를 따랐던 죄수가 교도관에게 죽기 전까지는, 게리 퍼들스의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자신의 살인으로 인해 생겨난 뜻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말이다. 분장을 지우고 다시 나타난 법정에서 아서는 조커가 없음을 말한다. 그 자리에는 유약한 망상증 환자 아서 플렉만이 남아있었다.
리는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에게 실망했고 그를 외면했다. 조커를 원했던 그녀는 조커가 없음을, 미련한 아서 플렉만이 남아있음을 깨닫고 실망한 거다. 나도 그랬다. 두 편의 영화 내내 아서 플렉의 아픔에 공감한 줄 알았지만 진짜 아서 플렉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외면했다. 다시 조커가 되어 법정의 모든 이를 죽이기를 바랐다. 내 유희를 위해 다시금 살인마가 되기를 바랐다.
요구하지도 않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를 바꾸곤 한다. 사회적으로 '착하다'는 틀 안에 맞추기 위해 나를 깎고 모양을 잡아가며 사포로 긁어내고 긁어낸다.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극적으로 말하고 친구들을 놀리기 위한 결점을 찾는다.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뚱뚱한 체형부터 이빨에 낀 고춧가루까지, 하찮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 친구를 총으로 쏘고 또 쏜다. 조커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기대는 나를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분장시킨다. 작품의 아서도 그렇다. 누군가의 직접적인 요구 없이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분장을 하는 나이기에 조커만을 기대하는 대중들에 갇힌 아서가 가엾다. 아서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를 향해 있었다는 게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