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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샴페인 Jun 17. 2020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쓰기의 말들>에서 오늘도 한 보따리 꺼내며...

주기적으로 머리를 자르러 가는 미용실 사장님은 과다 긍정녀다. 뭐든 안 되는게 없고, 모든 주려하고, 도무지 미용실은 왜 하시는지 의문이 간다. 음식얘기로 시작되면 그걸로 한 시간이 훗닥간다.

어제는 다육이 얘기로 그 시간을 채우고 있을 즈음 "사장님은 표현력이 워낙 좋으셔서 글도 잘 쓰시 겠어요" 물었다. 역시 모든 안되시는 게 없는 사장님의 답 " 저 글 잘써요. 뭐든 써서 출품하면 다 입상해요. 그런데 제가 글을 쓰는 걸 싫어해요" 요즈음 매일 글쓰기를 시작 한 나로서는 위안이 되지는 않는 대화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내가, 학창시절 글짓기 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내가, 읽는 인간에서 쓰는 인간으로 진화좀 해보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정작 타고난 재능이 있는 그 얄궃은 분은 쓰기를 안한다고...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와 함께 문득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는 글 쓰는 재능은 없고, 정말 못 쓰는데 쓰는걸 좋아해요"


작가 은유는 '쓰기의 말들'에서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라고 했는데 쓰는 고통과 안 쓰는 고통 둘 다 크면 그때는 어쩌지...


문제는 감정의 분출이 도무지 안된다는 것이다. 뭐든 밍밍한 나의 감정은 무슨 방어가 꽉 붙잡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럴때는 필사가 최고다


그 표정이 흡사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이다. 사로잡힌 자에게 나오는 달뜬 눈빛, 달아나는 감정을 붙드느라 빨라지는 말투, 일상에 침투한 낮선 사건을 낱낱이 풀어내려는 의지가 흘러넘쳤다. 나까지 덩달아 열정에 도취되는 찰나 선배가 한다는 말 "나 성욕도 싹 사라졌다.
선배는 이성애자. 살이 그립거나 존재가 외롭다거나 하는 생각이 날 틈이 없다는 거다. 제대로 빠졌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럴 수 있다. 글쓰기 행위 자체에 성애가 있다. 존재(필자)와 존재(글감)가 내통하고 감응하여 새로운 감각과 세계의 층위를 열어 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리비디가 오가며 서로의 속성이 달라지는 진한 애정행각이다. 김용택 시인의 말대로. 길가의 풀 한 포기도 당신으로 연결되는 게 사랑이라면 글 쓰는자의 신체가 딱 그렇다. 세상 만물의 질서가 글쓰기로 재편집되는 신비 체험이다. <쓰기의 말들>중에서


쓰고자 하는 열망만 가득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내 안에 리비도가 있음은 알 것도 같다. 그냥 일종의 카타르시스랄까, 아니면 무모한 동일시랄까, 노트북에서 무언가 두드리는 행위자체로 쓰는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기가 다름을 느낀다랄까. 그래도 쓰는 고통과 안 쓰는 고통은 평등하게 저리다.


 "등 두드러주는 말들을 오래 만지작거렸다"
"글과 관련된 칭찬이나 덕담을 나는 다 삼켰는데 그러고 나면 도둑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탐했다. 누군가 무심코 흘린 반짝거리는 말들을 훔쳤다. 이미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도 가로챌수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주 꺼내 보았다. 아직 없는 그것을 원래 있던 그것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채워 넣으려고 했다. 한 줄이러ㅏ도 더 쓰고 더 다듬어 나의 은밀한 초조를 다스 렸다. 내게 미미한 재능과 막연한 욕망이 있었더라도 저 사카린 같이 당도 높은 환각의 말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쓰다가 힘들면 말았겠지"


권혁웅<마징가 계보학>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 나탈리 골드버그-


강준만<글쓰기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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