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도 이 정도면 한도 초과다. 5월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 지 한참인데 이제야 그때 사진을 꺼내보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 바로 다음 날, 남양주 봉선사를 다녀왔다. 그때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겨놓고 이제나저제나 하다가 지금까지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 봉선사에서 좋았던 시간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았다. 게으름에 늦기는 했지만, 사진을 보니까 그날의 느낌과 기분이 오롯이 되살아나서 다시 봉선사에 다녀온 것 같았다.
봉선사에 처음 간 게 몇 년 전이다. 어떻게 봉선사를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내와 함께 갔다. 서울 근교서 산사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어서 기회가 되면 또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기억에서 멀어져 있었다. 불교를 좋아하지만, 어디 절을 정해 놓고 다니지 않는다. 또 주말마다 절을 찾을 만큼 믿음이 강하지도 않다.
절은 주로 여행할 때 찾는다. 어느 지역에 가면 그 지역에 있는 산사를 찾는 편이다. 그나마 특별한 날이면 절을 찾는데, 그 특별한 날이 부처님 오신 날과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날 때다. 부모님이 생각날 때면 부모님의 위패를 모신 인천 용화사를 찾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연등을 달러 삼성동 봉은사를 찾는다.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처님 오신 날의 절에 갔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는 가지 않았다. 부처님 오신 날의 절을 찾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사찰마다 너무 많은 사람으로 발디딜 틈이 없는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그렇다 보니까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 후에 절을 찾았다. 올해는 부처님 오신 날 다음날이 대체 휴무라 절에 가기 딱 좋았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봉선사가 퍼뜩 떠올라 망설임 없이 봉선사로 차를 몰았다.
부처님 오신 날 다음날이었지만, 전날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어 봉선사를 찾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래도 봉선사가 크다 보니까 혼잡하게 보이지 않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그저 좋구나! 하는 생각만 했지, 봉선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봉선사는 국립수목원과 붙어 있고, 세조의 능인 광릉과도 가깝게 있다. 특히 광릉과 가깝게 있어 광릉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때 법인 국사가 창건했고, 그때는 ‘운악사’라고 불렀다. 그 후 조선 예종 때.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을 부근에 조성하면서 선왕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봉선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화려하게 장식한 연등과 활짝 핀 5월의 꽃들이 어우러져 봉선사는 멋지게 변신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봉선사는 예전과 달리 더 많은 건물과 시설이 생겨 규모가 더욱더 커졌다.
큰 법당 앞마당에는 나처럼 부처님 오신 날에 절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줄 서서 관불의식을 하고 있었다. 작은 부처상에 물을 부으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큰 법당 옆 건물 마루에 앉아 지켜보았다. 두 손 모아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들 진지하고 간절해 보였다. 문득 사람들은 무슨 소원을 빌까 궁금했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각이듯이 바라는 소원도 저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공통적인 건 역시 건강과 돈 많이 버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물근성을 들켜버린 것 같았지만, 그래도 누구나 바라는 현실의 소원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말고지만 사람들의 그런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살 수 있고, 구차하게 살지 않을 만큼 돈을 세상은 조금 더 넉넉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 많은 걸 가지려는 욕심은 마땅히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봉선사의 핵심 전각은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큰 법당이다. 다른 절에 가면 대부분 대웅전이라고 하는 데, 봉선사에서는 큰 법당이라고 한다. 한글로 큰 법당이라고 쓴 현판이 정말 마음에 든다. 1970년 운허 스님이 현재의 전각을 건립하면서 스님의 뜻에 따라 큰 법당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큰 법당이라고 이름 지은 스님의 열린 생각과 과감한 결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대웅전이라는 말도 좋지만, 큰 법당이 훨씬 입에 착 감기고 또 그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예전에 왔을 때, 봉선사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 중의 하나가 넓은 연못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예전보다 연못이 더 커지고 연못 주변도 더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연못 주변 나무 그늘 밑에는 벤치가 있어 많은 사람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사찰이 아니라, 잘 꾸며진 어느 공원에 와있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까 커피 한잔과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마침 연못 옆에 카페가 있어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테라스에서는 연못의 경치가 한눈에 보였다. 테라스 그늘에서 여유 있게 쉬다 보면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를 잠시 잊는다. 정말이지 이렇게 편안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너무도 편한 시간을 소리 없이 흘러갔다. 몸과 마음이 쉬는 동안,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 긴장되어 있던 몸안의 세포들도 축축 늘어졌다. 이런 게 바로 힐링이다. 북유럽국가의 휘게(Hygge)가 생각났다. 휘게 문화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게 아니라. 작고 평범한 순간에서 행복과 만족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커피를 마시며 편하게 쉬는 지금의 시간이 휘게 문화와 닿아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사찰을 다녔지만. 사찰에서 이렇게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지 싶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7월에 피는 꽃이 연꽃이다. 그때가 되면 봉선사에서 연꽃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축제니까 사람이 많을 게 걱정되지만, 그때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시 한번 소소한 행복의 시간을 갖고 싶다. 활짝 핀 연꽃이 있어 이번보다 더 멋진 경치와 더 즐거운 행복의 시간을 마주할 게 분명하다. 오늘은 봉선사에서 일상의 쉼표를 제대로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