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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낡은 필름 속의 능내역을 만났다

by 레드산


능내역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오래전에는 능내역을 더러 들었는데, 그동안 거쳐 간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어느 때인가부터 기억에서 사라졌다. 능내역은 청량리역에서 경주를 오가는 중앙선의 한 역이었다. 기억 속에서 능내역이 사라졌듯이, 능내역은 역사의 저편으로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살아온 지난날의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언제 중앙선을 타 본 적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보아도 중앙선을 탄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청량리역에서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이나 강릉 바닷가를 갈 때 탔던 영동선에 관한 기억과 추억은 많지만, 중앙선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1970년대의 중앙선은 청량리역을 출발해서 제천, 영주, 안동, 영천을 거쳐 경주까지 이어지는 내륙 간선 철도였다. 경주까지 가는 걸 보면, 학창 시절에 한 번쯤 타 볼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타 보질 못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0년대에는 수학여행지로 경주가 제일이었다. 기차로 경주에 간다면 경부선이나 중앙선 중에서 하나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남들 다 가는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을 가질 못했다. 그 때문에 중앙선과의 인연은 닿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건 가정 형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중학교 때는 들뜬 마음으로 수학여행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학교보다 앞서 수학여행을 떠난 경서중학교 관광버스가 귀경길에 건널목에서 기차와 충돌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동안 온 매스컴을 달구었던 이 참사로 우리 학교 수학여행은 취소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아예 수학여행을 진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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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중앙선을 타 볼 기회는 물론 학창 시절을 추억할 소중한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남자들이 술 먹으면서 군대 이야기를 하면 친구 사이라도 군대를 갔다 오지 않는 친구는 섣불리 대화에 끼지 못한다. 그것처럼 수학여행의 추억을 이야기 자리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기차가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나 밤늦은 시간 숙소에서 선생님을 골탕 먹이던 이야기며 아슬아슬한 일탈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가 쏟아지면 입도 벙긋 못한다.


중앙선과 인연은 맺지 못했지만, 그래도 능내역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사람들 입을 통해서 가끔 들었기 때문이다. 능내역은 중앙선 광역전철 구간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폐역되었다. 그렇게 철도역의 역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리모델링한 능내역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간이역에 대한 궁금증과 레토르 감성을 느껴보려는 사람들 또 지난날 간이역의 추억을 더듬어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요즘의 크고 멋진 현대식 역사만 본 젊은 사람들은 자그마한 옛날 간이역이 신기하게 보일 수 있고, 흔히 말하는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어 그런지 능내역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어려서부터 능내역 같은 간이역을 보고 자란 세대다. 그 때문인지 간이역에 대한 감성이나 지난날의 추억은 물론 폐쇄된 역이 어떻게 남았는지 궁금했다. 그런 관심과 호기심이 능내역을 찾게 했다. 예상은 했지만, 간이역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폐역된 만큼 능내역은 작고 아담했다.


사실 자그마한 역이라 딱히 구경할 게 많은 건 아니다. 지금의 능내역은 관광용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예전의 능내역을 보지 못했지만, 리모델링했다니 그 당시의 역사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사실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에서 그 당시 능내역의 모습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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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역은 이것저것 부속 건물이 있는 게 아니라, 건물 하나가 전부다. 역사 앞에는 한때 기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녹슨 철로가 놓여있다. 능내역은 리모델링으로 새옷을 입었지만, 벌겋게 녹슨 철로는 딱히 하는 일 없이 누워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마다 보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안쓰럽게 보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철로는 어느 시점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과거와 현재가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철로도 평행선을 이룬다. 평행선을 이루며 뻗어나간 철로 끝에는 미래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철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준다.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고속 열차가 달릴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의 비둘기호나 통일호 기차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렸다. 그때 기차는 가다 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잠시 멈춰 서는 지방의 작은 역들은 우리 땅에 이런 지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곳이 많았다. 그때의 작은 역들은 능내역처럼 다들 고만고만했다.


능내역이 품었던 지난 시간을 나도 지나왔기 때문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역사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호기심을 안고 들어갔는데 별다른 게 없어 살짝 실망스러웠다. 역 크기만큼이나 작은 대합실 벽면에는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빛바랜 흑백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매표소 앞에는 그때 그 시절에 사용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쇠 난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역무원들이 사용했을 매표소 안쪽 공간은 잡동사니만 어지럽게 놓여있어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까 마치 영화세트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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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역에서 나의 눈길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역사 출입문 앞에 있는 빨간 우체통과 능내역 간판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성격이 무딘 편이라 여행하면서 보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능내역에서는 지난 옛 시간을 들추다 보니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과 예전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빨간 우체통이 무척 반가우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예전에도 간이역에 우체통이 있었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보지만, 그런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런 기억이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런 기억이 있으면 그만큼 더 반갑고 정겹기 때문이다. 아무튼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빨간 우체통을 다시 보게 된 건 참 좋았다.


요즘은 팩스와 이메일이 있고, 또 SNS가 있어 편지로 먹고사는 우체통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손으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던 오래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빨간 우체통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흘러가 버린 지난날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 같았다.


능내역 간판은 작은 역사와 달리 꽤 커 보였다. 빗물처럼 흘러내린 녹물이 간판 글자를 흐릿하게 가렸다. 간판 역시 리모델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판에서 능내역의 지난 역사와 시간의 느낌이 진하게 다가왔다. 허름한 간판이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랐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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