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보니까 백 권의 책을 읽었다. 2021년부터 읽기 시작한 책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놓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이 백 권의 책은 퇴근길에 지하철에서만 읽은 것이다. 백 권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2년 반이다. 책은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해서 지금까지 오랜 시간 가까이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 읽은 게 특별할 건 없지만, 이번에 백 권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2021년, 지금 다니는 회사에 우연히 응시하게 되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지도 않게 덜컥 합격했다. 정년퇴직 후에 이런저런 일을 꾸준히 해왔지만, 다시 또 새 직장에서 일하게 되어 참으로 좋았다. 지금의 회사 생활은 현역에서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일하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귀엽고 예쁜 아이들을 보는 일이 즐겁고, 빌딩 숲이 아닌 탁 트인 녹지공간에 근무지가 있어 근무 환경도 최고이다. 정말이지 뭐 하나 나무랄 게 없이 다 좋은데, 딱하나 옥에 티가 있다면 바로 출퇴근 거리이다. 사는 곳이 강동구 고덕동인데. 근무지는 강서구 방화동이다.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오가야 한다.
상일동역에서 지하철 5호선을 타면 대략 1시간 20분 정도 걸려서 방화역에 닿는다. 그렇다 보니까 지하철 안에서 하루 3시간 정도를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도 되고, 종점에서 종점을 오가다 보니까 힘들게 서서 갈 일은 없다. 하지만 앉아서 간다고 해도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는 게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이젠 이력이 났지만…
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밤늦게 자서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걸 좋아한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보려고 젊어서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기에 진즉에 포기했다. 이제는 출퇴근 거리가 멀어 어쩔 수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덕분에 원치 않게 아침형 인간을 흉내 내고 있고, 그 때문에 출근은 늘 비몽사몽 졸면서 간다.
퇴근 때는 피곤함이 없을 순 없지만, 그래도 출근 때와 달리 말똥말똥하다. 지하철에서 하는 일 없이 오랜 시간을 멀뚱멀뚱 보내는 게 쉽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자연스럽게 퇴근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핸드폰을 보았지만, 그 긴 시간을 핸드폰으로 다 메울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핸드폰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니다. 기껏 보아야 포털의 뉴스 정도다. 유튜브나 영화, TV, 게임 같은 건 거의 보지 않는다. 유튜브를 자주 보기는 하지만, 이십여 분만 지나면 금방 흥미를 잃는다. 그 때문에 효율적으로 시간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젊어서부터 하다 말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영어 회화 공부를 해볼까? 영어 회화는 지금도 하고 싶은 굴뚝같지만, 중간에 그만둘 것 같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작심삼일이라고 금방 포기할 거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생각난 게 책 읽기였다. 다른 게 뭐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책 읽기는 늘 하던 것이라 부담이 없어 책을 읽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동안 읽은 책들은 셀 수없이 많다. 지금처럼 읽은 책을 적어놓았더라면 몇 권을 읽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나만의 특별하고 소중한 자료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동안은 대부분 책을 사서 읽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으면 밑줄 치는 걸 좋아해서 빌려 읽을 수가 없었다.
퇴근길에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처음에는 책을 사서 읽었다. 퇴근 시간이 길어 하루의 읽는 양이 제법 많았다. 책을 사도 금방 읽게 되니까 다시 새 책을 사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는 아파트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고덕평생학습관이 있다. 집 가까이에 있지만, 그동안은 책을 사서 읽다 보니까 딱히 갈 일이 없었다.
이제는 고덕평생학습관의 단골이 되었다. 쉬는 날에는 학습관에 들러 빌린 책을 반납하고 또 읽을 책을 빌린다. 책을 고르려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게 쏠쏠한 즐거움이다. 학습관의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는 순간 역시도 좋고 이제는 그걸 즐긴다.
책은 주로 역사 소설과 인문 서적을 고른다. 특히 역사 소설을 많이 읽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 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책에 푹 빠지기 위해서다. 좋아하는 역사 소설을 읽다 보면 퇴근길의 긴 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책을 빌려 읽으니까 호주머니 사정과 관계없이 마음껏 역사 소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소설은 여러 권으로 나오는 게 많아 매번 사서 읽으려면 은근히 부담된다. 재밌는 역사 소설은 한번 빠지면 손에서 책을 놓기가 쉽지 않아 금방 읽게 된다. 그러니 책 사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읽고 싶은 역사 소설을 마음껏 읽지 못했다.
지금은 지하철을 타면 아무렇지 않게 책을 꺼내 펼친다. 처음에는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하철 안의 모습은 똑같다. 사람들은 지하철에 타서 서든 앉든 자리를 잡으면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러고는 하나같이 고개 숙여 핸드폰에 코를 박는다. 그런 속에서 혼자 책을 꺼내 펼치는 게 처음에는 꽤 어색했다.
다들 핸드폰을 보는데, 혼자 책을 펴는 게 지하철 안의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는 것 같았다. 또 혼자만 유별나게 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실상 다른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가끔 지하철에서 열심히 책 읽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때는 동류의식이 느껴져 무척 반갑다.
지하철에서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 재미 삼아 빌려 읽은 책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네 권으로 된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시작으로 백 권째 읽은 책은 황인경의 “독도”이다, 지금은 104권째 책인 ‘문무’를 읽고 있다. 일상에서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읽고 싶은 책 목록에 기록 해둔다. 이 습관도 읽은 책을 기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읽고 싶은 책의 목록과 읽은 책의 목록이 계속 늘어난다. 가끔 이것을 보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자 재미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책 읽기가 퇴근길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단순한 의미를 넘었다. 책 읽는 즐거움과 함께 또 다른 의미의 바람이 생겼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 퇴근길에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까 기간제로 근무한다. 매년 계약이 종료되고, 다시 또 공개경쟁을 통해 일할 기회를 얻는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3년째 계속하고 있지만, 내년에도 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의 일을 그만둔다면 아마 퇴근길의 책 읽기도 멈추게 될 것이다. 물론 언제 어디서든 책은 읽겠지만… 나만의 욕심이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자부한다. 그렇기에 퇴근길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그렇다고 무한정 이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현역에서 일할 때는 물리적인 정년퇴직으로 물러났지만, 이제는 물러날 때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물러나야 할 시점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본인이 더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시작한 지하철에서의 책 읽기가 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