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짙은 안개 때문에 모든 게 실루엣으로 보였다
베트남 다낭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호텔 로비로 내려갈 때였다.
우연히 우리나라에서 온 중년 부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탄 것으로 보아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게 서먹해서 인사 겸 별 뜻 없이 여행은 재밌었냐고 물었다.
말을 건네자마자 남자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에 갔는데 비 오고 안개가 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편의 불평이 당황스러웠든지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실 그때는 남자분이 왜 그렇게 불만스러워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다낭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주만 해도 계속 비가 내렸는데, 이젠 비가 그쳐 다행이라고 했다.
‘아하~~ 이분들은 여행하는 동안 비가 내려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비가 그쳤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여행 둘째 날, 바나산 국립공원에 갔다.
우리 남한 땅에서 제일 높은 산이 한라산으로 해발 1,947m이다.
아직 한라산을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가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걸어서 정상까지는 대여섯 시간이 족히 걸린다고 한다.
바나산 국립공원의 해발이 1,487m이다.
아마 걸어서 간다고 하면 가기도 전에 포기했을지 모른다.
다행히 바나산 국립공원에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5,043m 길이의 케이블카가 있어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도 25분 정도 올라가야 하니까 높기는 정말 높다.
그만큼 최고의 관광코스이다.
단순히 케이블카만 타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케이블카는 본 게임을 위한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멋들어진 골든브릿지를 비롯해 그 높은 곳에 다낭을 대표하는 테마파크가 있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흐리긴 했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그랬던 하늘이 케이블카를 타고 5분쯤 지났을까? 그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정상에 도착하니까 여름날 장맛비처럼 변했다.
비만 내리는 게 아니라, 사방에 안개가 잔뜩 끼어서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 뒤로도 비는 산을 내려올 때까지 오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일 년의 2/3가 흐린 날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렸을 때는 빗줄기가 강해서 구경이고 뭐고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들로 복작대는 실내에만 있을 수는 없어 비닐 우비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 골든 브리지가 이어진다.
골든 브리지는 반원형의 다리로 교각 대신 거대한 사람 손바닥 조형물이 다리를 받치고 있다.
거대한 손 조형물도 눈길을 끌지만, 안개에 가려져 있어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그 다리를 줄지어 걷는 사람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이 뒤엉켜 다리 위는 혼잡했다.
나도 그랬지만, 비 오고 안개 낀 날씨에도 사람들은 기념사진 찍기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
멋진 경치를 사진으로 남기려고 하는 마음은 세계인의 공통점이란 걸 새삼 다시 느꼈다.
얼굴 생김새나 피부색, 나라가 달라도 그런 점에서 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고지대인 데다 비까지 내려 체감온도는 영하처럼 느껴졌다.
두꺼운 옷과 비닐 우비를 챙겨온 덕분에 추위를 견딜 수 있었지만, 준비 없이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인도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두 팔이 다 드러나는 그들의 얇은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복장으로 입술이 파래지도록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어 안쓰러웠지만, 어찌해줄 도리가 없었다.
골든브릿지를 지나 테마파크에 갔지만, 날씨는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였다.
유럽의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멋진 건물과 정원, 거기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 그리고 놀이공원 등 구경거리가 많았지만,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경하는 걸 일찌감치 포기하고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쉬기로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녁도 아닌 오후 시간인데, 카페와 음식점들은 벌써 문을 닫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노천 파라솔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왜 이렇게 높은 곳에다 이런 시설을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곳이 예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들이 더위를 피해 만든 휴양지였다는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더는 딱히 할 게 없어 일찌감치 저녁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식사 장소인 바나힐 뷔페에 갔다.
꽤 넓은 뷔페에는 구경을 포기한 관광객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맛있는 수제 맥주를 곁들여 여유 있게 이른 저녁을 즐겼다.
식사하는 동안,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부부가 생각났다.
그때 남자분이 불만을 토로한 게 이곳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누가 바나산 국립공원이 어땠냐고 물으면, 날씨 탓이기는 했지만 아마 나도 그분과 똑같이 말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