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제대로 쌍계루를 본다

by 레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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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루는 장성 백양사 입구에 있다. 지금까지 서너 번 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쌍계루를 보러 간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아니다. 가을에 백양사 단풍을 보러 갔다가 보았을 뿐이다. 백양사 앞에 있어, 지나는 길에 자연스럽게 보게 되고, 또 쌍계루를 품은 연못의 경치가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백양사도 백양사를 보려고 간 것이 아니라,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어쩌다 보게 되었다.

내장산은 우리나라 유명 단풍 관광지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유명한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운 내장산 단풍을 보러 갔다가 초입부터 막혀 있는 끝없는 차량 행렬에 놀라 내빼듯이 백양사로 넘어갔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고 서너 번이다. 지금까지 내장산 단풍을 보지 못한 채, 늘 그렇게 백양사를 만났다. 그 때문인지 백양사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가을날의 백양사는 내장산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로 붐비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 보니 백양사 구경보다 사람 구경을 더 많이 했다. 백양사를 찾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진 촬영 포인트가 있다. 쌍계루 앞에 있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이다. 징검다리 한가운데에서 연못과 쌍계루 그리고 백학봉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는다. 사람들로 붐비는 단풍철에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정자 여행의 즐거움이자 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과 정자가 품은 멋진 경치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즐길 수 있으면 백 점짜리 정자 여행이 된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으면 완벽한 정자 여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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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쌍계루는 조금 특이한 상황이다. 쌍계루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진가가 조금은 가려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쌍계루를 백양사에서 보는 많은 전각 중의 하나로 여긴다. 또 찍고 싶은 사진 속의 피사체로만 여긴다. 사진 속의 쌍계루는 주인공인 듯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으로도 보인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쌍계루를 보려고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사람들로 발 디디기 어려운 가을날, 쌍계루 앞을 지나면서 눈여겨보는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또 쌍계루에 올라 경치와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들 단풍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최종 목적지인 백양사를 향해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다 보니 쌍계루의 참 멋이 반쯤 가려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백양사를 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당초의 목적지는 백양사나 쌍계루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고창에 갔다가 처형들과 점심으로 산채정식을 먹으러 가려고 집을 나섰다. 맛집이라고 찾은 식당이 도착해보니 백양사 초입에 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 아쉬워 소화도 시킬 겸 산책 삼아 백양사에 들렀다.

백양사로 가는 길은 사람에 등 떠밀려 가던 가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길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아니라 짙은 초록이 대신하고 있다. 가을날의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길은 한적하다. 몇 번을 왔지만, 이제야 백양사 가는 길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에서 백양사 입구까지 가는 길은 우리나라 100군데의 아름다운 길에 뽑힐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보여준다. 하늘을 가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쾌적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늘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덕분에 한낮을 달구는 날카로운 햇볕도 맥을 추지 못한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길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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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던 징검다리도 텅 비었다. 그 허전한 자리를 따가운 햇볕이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이참에 마음껏 즐기라는 징검다리의 눈길이 반가우면서도 어째 좀 어색하다. 처음 백양사에 왔을 때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누구나 찍으려고 하는 그 사진을 찍었다. 그냥 지나치면 나만 손해 보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거기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 제아무리 뛰어난 맛집이라도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하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린다. 그것처럼 기다리는 게 우선 싫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의 고수가 아니고는 다들 고만고만한 결과물이 나온다. 사진 실력이 없는 데다 나만의 감성으로 찍을만한 재주도 없어 사진 대신 눈으로 즐기고 말았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오늘만큼은 그냥 갈 수 없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징검다리에 내려선다. 징검다리 돌을 하나씩 건널 때마다 느긋하게 쌍계루를 바라본다. 그때마다 보이는 쌍계루 경치는 영화필름처럼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장면이 이어져 눈에 들어온다. 그중의 제일은 역시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보는 경치이다.

쌍계루는 고려시대 각진 국사가 창건했다.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운문암과 천진암 계곡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쌍계루 앞에서 잠시 멈추어 연못을 이루었다. 연못 위로 쌍계루가 은은하게 비친다. 백학봉도 그 그림 속에 들어 있지만, 연못에 비친 경치에서만큼은 쌍계루가 단연 주인공이다. 경치를 보다 보면 쌍계루 앞에서 계곡물이 연못을 이룬 것은 이 경치를 품으려는 나름의 안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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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자와 누각은 다르다. 가장 손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규모의 차이다. 누각은 정자와 달리 중층의 건축물로 크다. 그만큼 크기가 있어 누각은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쌍계루 역시 뒤로는 백학봉이 버티고 있고, 앞에는 넓은 연못이 있지만, 나름의 크기가 있어 어느 것에도 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긴 해도 한 폭의 경치를 완성하고 있는 백학봉과 쌍계루와 연못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조연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백학봉과 연못이 없었다면 쌍계루가 지금처럼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완성했기에 모두가 주인공이고 또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이 경치를 품은 쌍계루를 주인공으로 꼽고 싶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처럼 쌍계루에 직접 올라봐야 그 참 멋을 알 수 있다. 밑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볼 때와 바로 코앞에서 보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특히 규모에 대한 느낌이 그렇다. 가까이에서 보는 쌍계루는 당당함에 웅장함까지 더해진다. 현판 글씨는 날렵하면서도 힘이 있고 또 화려하다. 몇 번을 보았는데도 쌍계루의 하나하나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규모가 있어서인지 오르는 계단도 튼튼하다. 쌍계루 내부는 밖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널찍하다. 누각의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연못과 주변 경치가 역시 일품이다. 가을날에 울긋불긋 물들었던 연못은 성숙한 초록으로 바뀌었다. 분명 징검다리 돌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지만, 연못은 멈추어 있는 듯 잔잔하다. 이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쓸데없이 날뛰던 온갖 잡생각들이 제풀에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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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비친 쌍계루의 모습은 남도 제일의 경치요. 조선 8경의 하나로 꼽혔다. 옛사람들 입에 그렇게 오르내린 게 이해가 된다. 쌍계루 벽면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비롯해 여러 학자와 문인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사책에 나왔던 굵직한 인물들이 쌍계루를 다녀갔고, 시를 남겼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가 그 많은 시를 대표한다.


“지금 시를 써달라고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 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 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빛이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시를 읽으면 정몽주 선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쌍계루의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도 선생은 어지러운 나라와 임금에 대한 걱정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후손의 한 사람은 나라를 걱정할 그릇이 안 돼 그저 경치만 즐긴다. 쌍계루를 나와 백양사도 구경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백양사보다 쌍계루가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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