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다음날의 금수정이 유난히 돋보인다

by 레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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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찾을 때, 지자체 홈페이지를 많이 이용한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목적지보다 가고 싶은 지역을 먼저 결정한다. 지역이 정해지면 그 지역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는다. 주로 찾는 곳은 전통과 역사가 있거나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그때마다 빼먹지 않는 곳이 정자(亭子)다.

한때는 정자의 매력에 푹 빠져 전국을 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정자 여행이 흐지부지되었다. 그렇다고 아예 발걸음을 딱 끊은 것은 아니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다가 그 지역에 좋은 정자가 있으면 꼭 찾아봤다. 정자 여행에 빠졌을 때처럼 정자가 최우선이 아니었을 뿐이다. 유행이 돌고 돈다더니 나의 여행 패턴도 도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다시 정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여행이 아니라 다른 볼일이 있어 포천에 가게 되었다. 포천은 여러 차례 다녀온 곳이라 가보고 싶은 곳은 얼추 다 가봤다. 그래도 먼 길을 가는데 일만 보고 돌아오기가 아까워 갈만한 곳을 떠올려본다. 그제야 포천에서 정자 구경을 한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난다. ‘그래! 이참에 포천의 갈만한 정자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산 좋고 물 좋은 포천은 구경거리가 많은 곳인데, 포천시 홈페이지에 나오는 대표적인 여행지에는 정자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포천시 홈페이지에서 금수정을 찾으려면 파고 파고 또 파야 한다.

포털에서 포천에 가 볼 만한 정자를 검색하자 손쉽게 금수정(金水亭)이 뜬다. 부지런한 블로거들이 올린 포스트가 제법 있다. 이제는 내 안에 품은 세월의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게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이건 그럴듯한 말 포장이고, 사실은 소심해지고 노파심이 많아지면서 변한 것이다. 예전에는 가고 싶은 지역만 정해지면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여행 목적지는 지역에 도착해서 관광 지도를 보고 기분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이제는 출발하기 전에 목적지와 그에 관한 정보를 미리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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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포스트를 보면 금수정을 찾는 게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여행에서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인 내비게이션만 의지할 수 없는 것 같다. 오래 전, 내비게이션을 믿고 산사를 찾아가다가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급경사의 임도를 올라갔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을 퍼뜩 스쳐 간다. 안 되겠다 싶어 창수면사무소로 전화를 했다. 직원 말로는 내비게이션을 찍고 가면 별문제 없을 거라고 한다. 그제야 안심하고 늘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에 금수정을 입력한다.

별일 없겠지 했는데 별일이 생겨버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도착한 곳은 정자가 보이기는커녕 오가 교차로 부근의 국도변이다. 혹시 입력을 잘못했나 싶어 목적지를 다시 확인하고 돌아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허 참~~ 이럴 수가 있나?‘ 그때 마침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셨다. 얼른 창문을 내리고 금수정 가는 길을 여쭈어봤다.

왔던 길로 다시 가면 왼쪽에 금수정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고 한다. 되돌아 가보니 어르신들 말씀처럼 이정표가 있고, 도로에서 좌회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내비게이션은 거기서 우회전을 하라고 했으니 정반대로 안내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오류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금수정 가는 길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안동 김씨 고가가 나온다. 찾기는 제대로 찾았다. 금수정은 고가 맞은편에 있어 고가까지 왔으면 다 온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미리 정보를 파악한 게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다 왔는데도 모르고 헤맸을 지 모른다. 금수정은 고가 맞은편에 있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데다 나무에 슬쩍 가려있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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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를 만나러 가는 순간은 늘 떨린다. 정자와 다른 여행지를 만날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둘 다 설렘과 기대가 있지만, 그 느낌의 강도는 정자를 만날 때 더 크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보통의 여행지는 보는 즐거움과 느낌이 한 번에 끝나지만, 정자는 정자와 정자가 품은 경치가 있어 두 번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요즘도 학교에서 이 시조를 배우는지 모르겠다. 양사언 선생의 이 유명한 시조는 학창 시절에 배웠다. 포천 출신으로 조선 전기에 문신이자 문인이고 서예가인 양사언 선생이 정자를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 김명리가 정자를 세웠을 때는 풍수지리적으로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두정보다 금수정이 훨씬 어감이 좋고, 정자의 이름으로 어울려 보인다.

금수정은 김명리에서 양사언으로 그리고 안동 김씨 일가에게 소유권이 넘어 갔다. 별것 아닌 이야깃거리지만, 금수정 나름의 역사다. 어딘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자 여행을 하면서 소유권이 바뀐 이야기가 있는 정자는 처음이지 싶다. 금수정은 포천 한탄강 일대의 절경으로 꼽는 영평 8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89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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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 영역에 들어서면 먼저 커다란 두 개의 시 비석이 찾아온 이를 맞이한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시 비석에는 양사언 선생의 유명한 시조가 있고, 옆으로 퍼진 시 비석에는 고려 말기 학자인 척약재 김구용의 시가 새겨져 있다. 양사언 선생이야 한때 금수정을 소유했으니까 그의 시 비석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척약재 김구용의 시 비석은 왜 있는 걸까? 밑도 끝도 없이 시 비석을 세웠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금수정은 본래 척약재 김구용의 소요 처였다고 한다. 또 금수정을 지은 김명리가 김구용의 아들이니 그의 시 비석이 있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금수정 안내문을 보면 첫머리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영평천 옆의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평천에서 보면 그런 모습이겠지만, 지금처럼 가는 길에서 보면 그 말을 알 수 없다. 금수정은 위치한 자리가 특이하다. 발을 딛고 있는 평지보다 아래쪽에 있다. 처음 지었을 때의 지형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태로 보면 평지의 한쪽을 파내고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그렇다 보니 금수정 현판이 눈 아래로 보인다. 이것 역시 금수정만의 독특함이다.

금수정은 정자지만 작은 누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자와 누각은 형태와 크기로 구별할 수 있는데, 중층의 누각이 정자보다 크다. 그 때문인지 금수정 내부는 널찍하다. 대부분의 정자가 그렇듯이 정자에 오르면 품은 경치가 제대로 펼쳐진다. 금수정 앞으로 영평천이 한가롭게 흐른다. 어제 포천에는 비가 많이 내린 모양이다. 물이 크게 불었고, 영평천을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폭포처럼 변했다. 물소리가 어찌나 크고 시원한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무더위가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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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가 품은 경치는 대부분 정적이다. 산이 그렇고 계곡이 그렇고 바다와 호수가 그렇다. 물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모습을 뒤바꾸겠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정적인 경치이다. 그 때문에 정자에 오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여유로워진다. 오늘의 금수정은 시원하고 세차게 들려오는 물소리가 있어 정적인 경치에 배경음악이 깔린 듯 즐거움이 더해진다.

정자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아쉬운 점이 있다. 오래되고 이름 있는 정자들은 대부분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정자에서 멋진 경치를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자를 지은 선조들의 큰 목적이기도 하다. 나무를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나무들이 정자의 경치를 가린다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자 본연의 참 멋을 살리기 위해 나무를 옮겨 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름깨나 알려진 정자들은 대부분 향토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왕에 관리하는 거 이런 부분까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 금수정도 일어서서 보면 영평천의 경치가 보이지만, 앉으면 시야가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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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과 바위에 새겨진 양사언 선생의 글씨를 보겠다고 영평천으로 내려간다. 절벽 허리로 뱀이 지나가듯 수로가 이어졌다. 영평천이 불어 물가의 바위는 대부분 물에 잠겼다. 글씨 찾기는 이내 포기하고 금수정을 올려다본다. 안내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절벽 위에 세워졌다는 게 실감 난다. 금수정을 사진으로 멋지게 담으려면 영평천 건너편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 영평천과 절벽과 금수정을 하나의 앵글에 담을 때 금수정 경치가 완벽하게 완성될 듯하다.

여행하면서 굳이 좋고 나쁨을 평가를 하지 않는다. 여행은 목적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나서서 돌아올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다 여행이기에 어디를 딱 잘라 평가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자를 보고 나면 평가라고까지는 할 것이 없지만, 이것저것 재보는 버릇이 있다. 물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정자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있고, 품은 이야기와 경치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금수정도 금수정만의 독특함이 있어 정자 여행의 즐거움을 한껏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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