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인 멋으로는 수선루가 으뜸이다

by 레드산

그 꿈을 꾼 게 언제였을까? 아마 초등학교 2~3학년 때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오죽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여태 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아주 드물게 한 번씩 꿈을 꾸는데 전부 개꿈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 꾸었던 그 꿈이 아직 또렷이 남아 있는 게 정말 신기하다. 꿈속이었지만, 그만큼 기쁘고 놀랐던 모양이다. 꿈속의 내 모습은 당연히 철없는 초등학생이었다.


점심을 먹고 동네 아이들과 놀려고 대문을 나섰다. 그런데 평상시와 달리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골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여느 때 같으면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골목이 시끌벅적했을 텐데 말이다.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전봇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흙장난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땅바닥의 흙을 밀쳤는데 흙 속에서 동전 두 개가 나왔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깜짝 놀랐다. 혹시나 해서 옆에 있는 흙을 밀쳤는데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동전이 나왔다. 그 뒤로도 흙을 밀쳐내는 대로 동전이 나와 혼자 뛸 듯이 기뻐하다가 꿈에서 깼다. 지금 그런 꿈을 꾸었다면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부리나케 복권판매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진안에서 수선루를 마주하는 순간, 생뚱맞게 그 꿈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파격적인 수선루 모습에 횡재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나 보다. 수선루는 지금까지 보았던 정자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좋다는 정자를 여러 곳 가보았지만, 수선루처럼 특이한 형태의 정자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정자는 빼어난 경치와 함께 자연 속에 녹아든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을 때 그 멋이 완성된다. 그 때문에 이름깨나 알려진 정자는 다들 그림 같은 경치를 품고 있다. 때론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제멋을 다 보여주는 곳도 있다. 거대한 자연 바위굴에 딱 들어맞게 끼워 넣듯이 세워진 수선루가 바로 그런 곳이다. 정자 자체의 독특한 멋으로만 친다면 수선루가 으뜸이지 싶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또 어떤 정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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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를 찾아가는 길은 늘 수고스럽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도 정자 턱밑까지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정자가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고, 자연의 품속에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수선루에 다 왔다고 내비게이션이 호들갑을 떠는데, 정작 도착한 곳은 서원 건물 앞이다. 좌우를 살펴봐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자를 찾아다닌 경험으로 볼 때, 이름난 정자 주변에는 눈길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일 수도 있고, 빼어난 자태의 소나무일 수도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쪽저쪽을 살펴봐도 그럴듯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내비게이션을 다시 확인해보지만, 목적지는 정확히 입력했다. 일단 차에서 내려 찬찬히 주변을 살핀다.

그때 산으로 나 있는 길 앞에 수선루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가 있는 것을 보면 오기는 제대로 온 것 같은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산길이다. 그 안쪽으로 정자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동안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생긴 나름의 감이 있다. 그 감이 전혀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럽다. 수선루까지 거리가 70m라고 하니 속는 셈 치고 발길을 옮긴다.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안내문까지 있는 것을 보면 잘못된 것은 아닌데, 의구심의 찌꺼기가 여전히 남는다. 평범한 산길을 반신반의하면서 걸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앞쪽의 상황이 궁금해 산 위쪽을 살핀다. 그때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숨어있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위치적으로 정자가 있을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지만, 단청을 입은 덕분에 쉽게 눈에 들어온다. 수선루는 거대한 바위틈에 꼭 맞추어져 있다. 여태껏 이런 정자를 본 적이 없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는다. 정말 놀랍고 파격적인 색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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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산삼을 찾은 심마니의 마음처럼 가슴이 쿵쾅댄다.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단숨에 올라 수선루 턱밑에 선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할 말을 잃는다. 수선루 앞에선 지금이 딱 그렇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수선루는 자연 바위굴에 맞추어 지었다.


맞추어 지었다는 표현보다 딱 맞추어 지은 다음에 밀어 넣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바위굴 모양새에 맞추다 보니 정자의 1층과 2층이 어긋나 있지만, 그것이 더 특별한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어긋남이 정자 전체의 맛과 멋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어떻게 이곳에 이런 정자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조선 시대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토록 파격적이고 기발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도 더욱더 빛난다. 요즘 사람들이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면 모양새는 물론 공사의 편리성을 위해 바위굴을 손보았을 것이다.

편액의 글자는 힘이 넘치면서도 미끈하고 아름답다. 편액이 수선루만의 고풍스럽고 색다른 멋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런 특별한 형태의 정자가 처음이다 보니 작은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욕심을 부리다 발이 미끄러져 자칫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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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루는 조선 숙종 때 연안 송 씨의 네 형제가 선대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 형제들은 팔십 너머까지 아침저녁으로 수선루에 올라 바둑과 시문을 즐겼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짧은 수명을 생각하면 그들은 장수한 셈이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신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사 최계옹이 수선루(睡仙樓)라고 이름을 붙였다. 졸음 수(睡)에 신선 선(仙) 자를 썼으니 신선이 쉬는 곳이나 자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어 정자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그런지 태극 문양이 그려진 문은 굳게 닫혀있다. 수선루를 코앞에 두고 올라보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어떻게든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가까이 가보니 자물쇠는 있지만, 다행히 잠겨 있지는 않다. 정적만 흐르는 산속이라 그런지 선뜻 문을 열지 못한다. 잠시 머뭇대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친다. 수백 년 갇혀 있던 세월이 깨어나듯이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수선루의 속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선루 밑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자연의 바위굴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무숲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수선루에 가로막혀 안쪽은 어둑하다. 안쪽 바위에는 언제 누가 새겼는지 알 수 없는 “송 씨 수선루”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밝은 햇살을 적당히 가로막고 선 수선루의 뒷모습은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가만히 보면 바위 모양도 독특하다. 진안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마이산이 있다. 마이산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곳의 바위는 자갈과 모래가 박혀있는 역암이다. 수선루 바위도 같은 지질대여서 그런지 역암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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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의 묵직한 무게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수선루에 올라선다. 밖에서 볼 때와 달리 마루가 널찍해서 열사람 정도는 충분히 둘러앉을 수 있다. 한쪽 높은 곳의 작은 방도 서너 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다. 여느 정자들처럼 사방이 툭 터져 있지는 않지만, 정자 정면의 경치를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수선루 정면 저 멀리 섬진강이 흐른다. 왜 이곳에 정자를 만들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초록의 경치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송 씨 형제들이 지냈던 모습을 상상해보면 신선이 노는 곳이라 할 만해 보인다. 수선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시문을 짓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달 밝은 밤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형제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도 그려진다. 그들은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잊었을 것 같다.


이렇듯 마음에 드는 정자를 발견하면 낭만적인 상상의 날개가 걷잡을 수 없이 펼쳐진다. 잠시 지금의 나를 잊고 아득한 그 시절의 시공간 속으로 빠져든다. 정자에서의 이런 상상 놀이는 생각보다 재밌다. 세상과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것도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멋진 곳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본다. 수선루가 내 것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