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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Jan 07. 2022

차가운 눈발 속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자네는 누군가?

어디를 갈까? 오랜만에 구례를 가는 길이라 정자가 보고 싶었다. 구례를 몇 차례 드나들었지만, 정자 구경을 하지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두세 군데 정자가 나온다. 이럴 때마다 고민이다. 한군데만 있으면 이것저것 생각할 게 없다. 이렇게 몇 군데가 있어 그중의 한군데를 골라야 하면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다. 욕심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우선 시간이 부족하고, 한 번에 여러 정자를 보면 좋은 느낌이나 감동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사진과 설명을 보면서 이리저리 저울질하다가 운흥정으로 정했다. 서울에서 출발해 진도, 완도, 남해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리는 거라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갔는데 실망스러우면 그것처럼 허탈한 게 없다. 

아침 일찍 남해에서 출발할 때부터 하늘은 잔뜩 흐렸다. 비가 됐든 눈이 됐든 둘 중의 하나는 내릴 것만 같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추운 줄 몰랐던 날씨는 옷깃을 단단히 여며야 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구례로 가는 동안 날씨는 수시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마음도 덩달아 널뛰기를 한다. 

구례 땅에 들어서 저 멀리 지리산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기어코 눈이 날린다. 가늘게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굵어져 차창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내리는 모양새를 보아서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눈 내리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게 올겨울 들어 처음이다. 차창을 때리는 눈은 여름밤 시골길에서 달려들던 하루살이처럼 부딪쳤다가는 이내 사라진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꼭대기는 이미 눈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정자를 보러 가는 길이라 안 그래도 마음이 잔뜩 들떴는데, 반갑게 눈까지 내리니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국도를 빠져나와 작은 길로 들어선다.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다 왔다는 내비게이션의 외침에 주변을 살핀다. 평범한 시골 들녘에 운흥정이 눈을 맞고 서 있다. 버선발로 마중 나와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에 찾아오는 여행자가 싫지는 않은 눈치이다. 운흥정은 평지에 있어 바로 옆에 차를 세울 수 있다. 

가는 눈이 세차게 흩날린다. 운흥정은 내리는 하얀 눈 뒤로 숨었다 내보였다 하면서 사람의 마음과 눈길을 잡아끈다. 늘 그렇듯이 정자에 도착하면 놀이공원에 들어선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허둥댄다.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운흥정이 어디로 도망갈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차를 세우자마자 벌컥 문을 연다. 

그 순간, 깜짝 놀라 얼른 문을 닫는다. 매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서둘러 후퇴한 꼴이 되었다.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차디찬 찬 바람이 순식간에 공격을 해왔다. 깜짝 놀라 ‘아니? 겨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추웠지?’ 하는 생각이 다 든다. 요즘의 겨울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겨울도 아니다. 손등이 갈라지도록 매섭게 추웠던 옛 겨울이 다시 찾아온 것 같다. 

따뜻한 남쪽 지방을 여행한다고 두툼한 파카는 준비하지 않았다. 얄팍한 파카의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려 바람이 치고 들어올 공간을 원천 봉쇄한다. 혹시 몰라 챙겨왔지만, 여행 중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목도리도 두른다. 거기에 모자까지 눌러쓴 다음에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다. 

허리에 손을 얹고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던 날카로운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바늘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들려고 온몸을 휘감는다. 나름 단단히 준비한 덕분에 찬바람은 허탕을 치고 만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잔뜩 화가 난 차가운 바람은 대책 없이 노출된 얼굴을 사정없이 할퀸다. 보통 눈 내리는 날은 춥지 않은데, 오늘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찬 바람과 뚝 떨어진 기온이 체감온도를 확 떨어뜨린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호들갑 떠는 여행자의 모습이 볼썽사나운지 운흥정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자고로 선비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의연하게 눈바람을 맞고 서 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주눅이 들어 슬쩍 심사가 뒤틀린다. 옛날에 가난한 선비는 끼니가 없어 숭늉을 마시고도 이빨을 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처럼 이 매서운 추위에 운흥정도 체면치레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못난 생각을 해본다. 

운흥정의 옆 모습과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운흥정은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옆에 대칭으로 널찍한 마루가 있다. 작지 않은 규모라 마음 맞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며 또 시를 지으며 시간 보내기에 넉넉한 공간이다. 정자에 올라가 보고 싶지만, 추위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흙담 넘어 남의 집을 들여다보듯이 난간에서 정자를 살핀다.

정자의 천정에는 정말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큼지막한 현판을 가득 채운 굵직한 글씨체의 운흥정 현판 말고도 셀 수 없이 많다. 천정에 가득한 현판들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처럼 달려있다. 그 많은 현판은 운흥정이 세워진 시기를 알려주는 상량문과 이를 기록한 기문 그리고 시사계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제영문이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80여 개에 이른다.


 


운흥정은 1926년 지역 선비들이 문학단체인 “시사계”를 조직해서 운흥용소 위에 만든 정자이다. 지역의 미풍양속과 시의 기풍을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1926년에 지었으니 생각처럼 오랜 역사를 지니지는 않았다. 그동안 만났던 정자들이 품은 역사와 세월에 비교하면 그 무게가 가볍다. 

우리 근대사에 역사적 사건인 3.1운동이 1919년에 있었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이 있었다. 역사의 시기를 보면 운흥정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지역 선비들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이어졌고, 그것이 또 독립의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정자 여행을 할 때의 여유를 도저히 즐길 수 없다. 차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드러낸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구경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난 매서운 추위지만, 운흥정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멋을 포기할 수는 없다. 

운흥정 아래에 있는 용운교를 건넌다. 용운교 밑으로는 구례를 관통해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서시천이 흐른다. 서시천의 맑은 물은 운흥정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암반에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린다. 잠시 머물다 가는 물이 소를 이루어 운흥정의 멋과 운치를 더했다.

맑디맑은 운흥용소와 묵직하면서 투박한 암반, 추위도 잊은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커다란 나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넉넉하게 품은 운흥정이 하나로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를 이루었다. 왜 이곳에 운흥정을 지었는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용운교를 건너 운흥정과 마주 서면 운흥정의 이 아름다움과 참멋을 만날 수 있다. 얄팍한 파카로 감당할 수 없는 추위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그래도 날리는 눈발 속에 슬쩍슬쩍 가려지는 운흥정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눈 내리는 운흥정을 보았으니까 운흥정의 겨울 경치만큼은 제대로 본 셈이다. 

운흥정을 보면 옛사람들이 아무 데나 정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된다. 운흥정으로 오는 길의 주변 모습은 그야말로 평범한 시골이었다. 그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운흥용소의 빼어난 경치를 놓치지 않고 정자를 지어 그 멋을 고스란히 품었다. 

운흥정 앞에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낸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뭇잎 떨군 채 앙상한 가지를 적나라하게 보이는 나무는 왠지 모를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꽃이 피고 초록이 가득한 계절의 그 멋스러움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그런데 옥에 티가 있다. 고풍스럽고 운치 가득한 운흥정 앞에 용운교가 자꾸 신경 쓰인다. 다리를 만들 때의 상황을 모르니까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운흥정을 조금만 더 배려한 다리를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예상치 못했던 추위 때문에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와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찬바람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차 속으로 피한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녹이고 나서 천천히 운흥정을 빠져나간다. 온전히 채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백미러에 비치는 운흥정을 자꾸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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