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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Nov 21. 2021

가을의 한복판에서 화려한 숲길을 걷는다

가을은 어떻게 오는가? 가을은 서늘한 바람을 타고 온다. 바람을 품고 찾아온 가을은 허공을 맴돌며 푸른 하늘을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린다. 파란 하늘만으로는 심심해서 그 위에 순백의 아름다운 구름을 펼쳐놓는다. 그렇게 찾아온 가을에 사람들이 빠져들기 시작할 때, 화려한 단풍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는다. 그것도 잠시 보도블록 위에 나뒹구는 낙엽만 남겨놓은 채 온다, 간다는 말 없이 가을은 사라진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가을을 해마다 겪으면서도 늘 아쉬워한다. 이 정도로 겪었으면 이골이 날 만도 한데,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또 아쉬워한다. 봄가을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두 계절의 느낌과 정취가 가면 갈수록 희미해진다. 짧고 진하게 계절을 만날 수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억지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 아쉬움을 숨길 수는 없다.

 

가을이 왔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가을은 하루가 다르게 익어간다. 가로수 잎들이 노랗고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 변하는 속도가 고속철만큼이나 빠르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가을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가을을 놓쳐버린다. 숲이 초록으로 뒤덮였던 날에 길동생태공원을 다녀왔다. 그때 공원을 나오면서 싱그러운 초록이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가을날의 경치가 무척 궁금했다.


가을이 물든 그 경치를 보아야 길동생태공원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길을 돌리면서 가을날에 다시 오겠다고 나 자신과 굳게 약속했다. 그 굳은 약속이 무색하게 공수표만 날리고 어물쩍 해를 넘겼다. 그렇게 된 데는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도 있지만,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고 서둘러 떠난 가을 탓도 무시할 수 없다. 


하던 일을 끝낸 이번 가을은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길거리에 가로수는 물론 아파트단지 내의 나무들을 보면서 가을이 익어가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핀다. 올해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데다, 기왕이면 가을의 절정에 딱 맞추어 가 보고 싶었다. 드디어 호시탐탐 노리던 때가 왔다. 나뭇잎이 예쁘게 물들었다 싶은 오후, 설레는 마음으로 길동생태공원을 간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노렸던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길동생태공원 앞의 보도는 낙엽으로 포근하게 뒤덮였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나무들은 이 가을에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정취를 한껏 드러냈다. 친구들로 보이는 중년 여자분들이 그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십 대 소녀로 돌아간 듯한 그분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가을의 허공 속으로 기분 좋게 퍼져나간다.


흔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년 남성들은 이런 가을 경치 앞에서 그녀들처럼 드러내놓고 즐기지 못한다. 멋진 경치를 두고 느끼는 마음은 남자나 여자나 다를 바 없지만,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속마음을 온전히 다 드러내지 못한다. 어떨 때는 해맑게 웃고 떠들며 즐기는 여자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이것을 보면 남자와 여자 간에 감성의 그릇 크기와 무게가 같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마음속에 가을을 잔뜩 주워 담고 길동생태공원에 들어선다. 한번 와봤던 곳이라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바로 어제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길동생태공원을 돌아보는 데는 오른쪽과 왼쪽의 두 길이 있다. 오른쪽은 천호대로와 가까이 있는 흙길이고, 왼쪽은 데크 길로 되어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하는 유행가 가사가 있지만, 두 길을 앞에 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어디로 가든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어느 쪽으로 먼저 갈지 살짝 고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는 왼쪽 길을 가리킨다. 이정표도 이정표지만, 처음 왔을 때 오른쪽 길에서 시작했으니까 이번에는 공평하게 왼쪽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길동생태공원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 있게 걸으며 자연의 숲과 습지를 즐길 수 있다. 좋은 계절을 맞아 생태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있지만, 전혀 복잡하지 않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천천히 걸으면서 가을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초록이 무성했던 나무들이 이제는 헐겁게 보인다.

 

싱그러운 생명력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성질 급한 녀석들은 벌써 땅바닥에 누웠다. 나무들은 헐거워진 몸뚱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쑥스러워 화려하게 치장한 것 같다. 그 화려함 이면에는 생존을 위한 나무들의 숨은 노력이 감추어져 있지만, 아름다움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것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초록이 가득했던 날의 숲은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반면에 가을을 맞은 숲은 화려함으로 감출 수 없는 쓸쓸함과 지혜로움이 함께 느껴진다. 춥고 긴 겨울을 지나 봄과 여름을 보내면서 터득한 자연의 순리와 지혜가 숲에 베어져 있는 듯하다. 그것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느끼려고 천천히 걸으려 애쓴다. 그렇지만 숲에 걸린 아름다운 가을 경치가 있어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느덧 숲속을 가로지른 데크 길이 끝나고 흙길로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누렇게 익은 벼와 허수아비가 눈에 들어온다. 어려서는 자주 보았던 허수아비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이게 얼마 만인지 잊힌 그 시간을 헤아릴 수 없다. 어렸을 때, 시골 들녘에서 흔하게 보았던 허수아비가 요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허수아비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무리 지어 날아다니며 벼 이삭을 노리던 참새들도 보이지 않는다.

 


요즘 들어 추수를 앞둔 들녘에서 참새들을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황금 들녘을 헤집고 다니던 참새들이 통 보이지 않는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 때문인지, 도시처럼 변한 시골의 환경 때문인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추수기가 다가오면 참새떼를 쫓느라고 농부들이 골치를 앓았다. 허수아비로는 역부족이라 직접 논에 나가 목청껏 소리 높여 참새들을 쫓았다. 또 반짝거리는 은박지 줄을 논에 잔뜩 걸어 놓기도 했다. 도시 사람에게는 서정적으로 보였던 그런 광경이 이젠 추억 속에 파묻혔다. 그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허수아비가 참으로 반갑다. 


이렇게 보기가 귀해져서 그런지 어느 고장에서는 허수아비 축제까지 하지만, 그렇게 서 있는 허수아비들은 왠지 자연스럽지 않다. 세월이 바뀌다 보니 허수아비가 입은 옷도 세련되었다. 아웃도어에 목도리를 둘렀고, 깨끗한 모자까지 세련되게 차려입었다. 너덜거리는 밀짚모자에 헐렁한 바지저고리를 입었던 옛날 허수아비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벼를 일부 베어낸 논은 손바닥만 하다. 그래도 누렇게 익은 벼와 허수아비가 있어 가을들녘을 체험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풍요로운 가을들녘을 보기 어려운 도시아이들과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체험의 기회가 될 것 같다. 예전의 가을들녘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되새겨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런 벼와 허수아비가 있어 가을의 정취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길동생태공원에 내려앉은 가을 속을 걷다 보면 어느새 출발점에 도착한다. 그만큼 생태공원에서 보낸 시간과 경치가 참으로 즐겁고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은 다시 돌아오지만,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이 가을은 이것으로 끝이다. 또 오늘이 지나면 가을은 멀찌감치 달아날 게 뻔하다. 이렇게 쉽게 가을을 보낼 수는 없다.


머리에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발걸음은 이미 왔던 길을 되짚는다. 가을을 복습한다. 행여 놓치는 것이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가을을 담는다. 아직 겨울이라는 계절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가을의 한복판에 있으면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것이 가슴으로 진하게 느껴진다. 


겨울은 묵은해와 새해가 겹쳐 있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아쉬운 느낌이 가을만 못하다. 오늘의 이 가을은 자연이나 사람에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토막의 시간이다. 이 가을을 빛내고 있는 나무들은 화려했던 오늘을 잊고 길고 추운 겨울을 버텨야 한다. 그래도 따뜻한 봄날을 다시 맞이할 수 있는 자연의 순리와 희망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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