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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Jun 01. 2021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세월의 저편에 잠시 머문다

"야아~~ 여 경치 쥑기네~~"

"말 마라~~ 여는 새북에 물안개 피믄 쥑긴다. 그땐 사진 찍는 사람들이 천지삐까리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우리나라가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간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다. 어렸을 때는 더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했고, 바람이 불면 더위가 금방 가셨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여름 날씨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그 때문에 기분 나쁘게 끈적끈적하고 숨이 턱턱 막힌다. 세트 메뉴마냥 더위와 짜증이 함께 사람을 힘들게 한다.

대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그 때문에 대구 여름은 덥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오죽하면 대프리카라는 말이 다 나올까. 이제는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대구만 아니라 전국이 어디 할 거 없이 다 무덥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여름이 작년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것 같다.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인데도 작년 여름은 정말 잊히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나 싶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대구 온 김에 여행으로 가보지 못한 경산을 가려고 한다. 경산은 대구 옆에 있어 대구 못지않게 더울 거라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장마라고 하는데 비는 오지 않고 연일 35~6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더운 날 무더위를 피해 눈요기를 할 만한 곳이 있을까? 경산에서 갈만한 곳을 뒤적거리다 반곡지를 발견한다. ‘어! 이거 많이 듣던 곳인데?’ 반곡지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찾는 곳이다.

인터넷에서 반곡지 사진을 몇 번 봤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성지처럼 찾는 곳이니까 멋진 경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왠지 좀 찜찜하다. 걸어 다니기도 고역스러운 무더운 날에 저수지를 가는 게 맞나? 그렇다고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도 귀찮아 반곡지로 목적지를 정한다.


 


대구에서 경산 반곡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무더위 때문인지 널찍한 주차장이 텅텅 비었다. 시원한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더위에 한순간 맥이 쑥 빠진다. 정신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장 한쪽에서 할머니가 천도복숭아를 팔고 계신다. 징그럽게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반곡지보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에 먼저 마음이 간다. 

할머니가 건네는 복숭아를 맛보며 뭉그적대다가 일단 복숭아부터 사고 본다. 복숭아는 반곡지를 둘러보고 가는 길에 가져가기로 하고, 할머니께 반곡지 위치를 여쭌다. 할머니가 웃으시며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바로 코앞에 두고 물었으니 말이다. 복숭아에 정신이 팔린 건지 아니면 무더위에 정신이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무에 살짝 가려져 있는 반곡지를 보지 못했다. 

정자처럼 생긴 원두막 뒤로 반곡지가 펼쳐진다. 너무 기대해서 그랬는지 사실 반곡지의 첫 모습을 실망스러웠다. 유명세만큼 크지도 않고, 저수지 가장자리는 온통 수초로 뒤덮여 있어 딱히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없다. 여행하다 보면 호수라고 불릴 만큼 맑고 큰 저수지를 가끔 본다. 거기에 비하면 반곡지는 그야말로 아담하다.    

반곡지는 저수지를 끼고 한 바퀴 돌 수 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을 게 틀림없다. 아니 이 무더위에 반곡지를 온 이상 그것을 꼭 찾아야 한다. 일단 탐색하듯 반곡지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차가 다니는 큰길 쪽보다는 야트막한 산 쪽이 더 좋아 보여 그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얼마 가지 않아 반곡지가 보여주는 맛보기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저수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이 여름날에 유난히 돋보이는 하늘 모습이다. 그 하늘을 배경 삼아 왕버들이 늘어서 있다. 하늘과 구름, 왕버들과 저수지가 한데 어우러진 경치는 이제 막 물감칠을 끝낸 캔버스의 그림 같다. 시골 저수지의 평화롭고 서정적인 경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것으로 부족할까 봐 그랬는지 그 경치를 그대로 복사해 반곡지 수면 위에 갖다 붙였다. 

물 위로 하늘이 내려앉은 것인지 하늘 위로 물이 올라간 것 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굳이 가를 게 없지만, 실물보다 수면 위에 비친 반영 경치가 더 아름답다. 사진도 있는 그대로 쨍하게 나온 것보다 그 멋을 은근히 중화시킨 사진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 속의 반곡지 경치가 떠오른다. 지금 보이는 경치에 새벽 물안개가 보태진다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연출될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경치를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반곡지는 경산지역 사진작가들이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른 새벽 물안개에 잠긴 왕버들 경치는 반곡지의 자랑거리이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겐 그 아름다운 경치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정 넘치는 사진작가들이 있어 편하게 앉아 사진으로나마 그 매혹적인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반곡지의 주인공은 둑길에 늘어선 왕버들이다. 새벽에 우렁각시처럼 나타나는 물안개는 주연을 빛내기 위한 조연의 역할이다. 가까이서 보는 왕버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장관이다. 저수지 둑에 늘어선 20여 그루의 왕버들은 세월의 무게가 300여 년이나 된다. 

왕버들이 늘어선 150여 미터 둑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둑에 뿌리를 내린 왕버들은 오랜 세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었던지 굵은 몸통과 가지를 수면으로 수그렸다. 개중에 꼿꼿이 서 있는 왕버들은 세월의 부침 때문인지 몸부림치듯 온몸을 뒤틀었다. 

흘러간 세월이 잉태한 가지들은 두툼한 몸통에서 제각각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이 저마다 독특하다. 어미의 배 속에서 나온 자식이 다 같을 수 없듯이 한 줄기에서 뻗어 나간 가지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의미를 보여준다. 무거운 세월을 보여주는 거무스름한 가지에 성숙한 초록 잎사귀는 단순한 멋스러움을 넘어 알 수 없는 신비함을 보여준다. 조금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무들은 저마다 심오한 세상을 품은 듯하다. 멍석만 깔아주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난날의 많고 많은 이야기를 금방이라도 쏟아낼 듯하다.


 


왕버들 구경에 푹 빠진 두 중년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열심히 설명하고, 다른 사람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 반곡지를 여러 번 와봤던 사람이 친구를 데려온 모양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그렇게 구경하던 두 사람이 왕버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꺼내 든다. 나도 그렇지만, 중년들은 셀카가 익숙하지 않다. 나름 애를 쓰더니 이내 포기하고 내게 사진을 부탁한다. 그 마음을 알기에 얼른 핸드폰을 건네받는다. 

둑길 한쪽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촬영을 하고 있다. 어떤 촬영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슬러 올라간 시간을 보여주기 좋은 왕버들과 고운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반곡지에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많이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들을 보지 못했지만, 왕버들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지금 모습을 보면, 거기에도 기가 막힌 장면이 나왔을 게 틀림없어 보인다. 반곡지의 빼어난 경치는 왕버들이 있어 완성된다. 오랜 세월 반곡지와 함께 한 왕버들이 없었다면 새벽 물안개나 저수지의 반영은 그냥 평범했을 것이다.   

경치에 취해 또 그 경치를 오래 가슴에 담고 싶어 느릿느릿 걸었지만 둑길 끄트머리에 이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발걸음을 붙잡는 듯했다. 그때마다 몸을 돌려 아쉬운 듯 왕버들을 바라봤다. 왕버들과 아이들 모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어느 먼 옛날의 공간처럼 보였다. 아득한 세월의 저편을 뒤에 두고 이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언제 한번 큰마음 먹고 물안개 피는 새벽에 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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