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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Mar 09. 2021

보령에 조선의 수군 기지 충청 수영성이 있다

「해유시화첩」이란 책이 있다. 조선 후기에 규남 화백원과 보령지역 문인 다섯 명이 함께 만든 기행 시화첩이다. 요즘으로 치면 공저 작품이다. 화첩 형식으로 만든 이 책은 그들이 충청 수영성 일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상을 그림과 시문으로 엮은 것이다. 해유시화첩에 나오는 <영보정도>에는 그 당시 충청 수영성에 정박하고 있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얼마 전, 보령 여행을 하면서 충청 수영성을 둘러보다가 영보정 앞에 있는 안내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후대에까지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을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무엇을 꼽겠는가. 사람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다 다를 것이다. 오백 년 역사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합쳐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은 속에서 천불이 날 정도로 치욕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해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선조 25년,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왜군이 이 땅을 침범했다.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은 순식간에 부산성과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까지 점령했다.

온 나라가 왜군에 무참히 짓밟혔고, 임금은 한양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몸을 피했다. 육지에서 관군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조선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덕분에 전쟁의 물줄기가 바뀌었고, 조선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병자호란은 시기적으로 임진왜란 뒤에 일어난 전란이다. 이때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런 치욕을 먼저 겪었을지도 모른다. 백의종군하며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시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는다. 요즘도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첫째 둘째를 다툴 것이다. 이순신 장군 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게 거북선이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한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유물이다.



영보정도에서 거북선을 보았을 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치 실물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 그려진 영보정도에 거북선이 나오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책에서 조각조각 배우다 보니 임진왜란 이후에 거북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끊어져 있던 역사의 줄거리를 이을 수 있어 여행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것처럼 영보정도에서 거북선을 만나니 충청 수영성에 대한 관심 더 커진다.

그동안 충청 수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수영은 조선의 수군 기지이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배우면서 경상 좌·우수영이나 전라 좌·우수영은 알고 있었지만, 충청 수영이 있는지는 몰랐다. 뒤늦게 조선의 수군 조직을 살펴보니 크게 삼도 수군 통제영과 삼도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남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는 역할을 하는데 그 밑에 경상 좌·우수영, 전라 좌·우수영, 충청 수영이 있었다. 삼도수군통어영은 서해와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막는 역할로 경기수영, 충청수영, 황해수영을 두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를 지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국토방위에 근간을 이룬다. 

충청 수영성은 충청 수영의 본거지로 조선 중종 때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쌓았다. 외곽 길이가 1,659m에 이르는 충청 수영성은 높은 곳에 있어 주변 바다와 섬을 살피기에 안성맞춤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 충청 수영 산하에는 군선 142척과 8,4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인적, 물적 규모가 대단하다. 그 많은 군선이 한군데 있지는 않았겠지만, 유사시에 집결했을 때는 그 위용이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충청 수영성을 간다. 아직 200여 m 남았다는 내비게이션의 메마른 외침을 무시하고 커다란 옛 건물이 보이자마자 급히 차를 세운다. 건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조급증이 발동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그 건물로 향해 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옆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꾸어 옆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동안 다닌 여행 감으로 볼 때, 그 건물은 충청 수영성의 핵심 볼거리일 확률이 높다.  

학창 시절, 어머니가 도시락에 넣어준 계란프라이는 아꼈다가 마지막에 먹어 치웠다. 그런 게 알게 모르게 몸에 배었는지 여행을 하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볼거리는 남겨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본다. 좋은 것을 먼저 보고나면 다른 게 시시하거나 관심이 떨어질까 봐 그런다. 여행길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조급증과 이런 습관이 수시로 충돌한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려고 했던 곳은 충청 수영성의 망화문 앞이다. 결국 망화문 앞에서 첫 출발을 시작한다. 

충청 수영성에는 사대 성문으로 진남문, 만경문, 망화문, 한사문과 함께 소서문이 있었다. 지금은 세월의 부침을 이기지 못해 다 허물어지고 망화문만 남았다. 서문이었던 망화문은 아담한 크기로 아름답다. 성문이라고 하면 대개 육중하고 견고한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망화문은 반쯤 둥그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홍예문의 멋스러움과 함께 아담한 크기여서 그런지 여느 성문과 달리 아름답게 보인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다들 망화문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다. 그들을 보면서 옛사람들은 어떤 일과 무슨 사연을 안고 이 문을 드나들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록 잎사귀를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는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같은 나무라고 해도 잎이 무성했던 계절에 보는 것과 지금 이 계절에 보는 느낌이 영 다르다. 그중에서도 팽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이가 크다. 해안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팽나무는 바짝 말라 거무스름하게 보이는 겨울에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떤 때는 그 모습에서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사람의 모세혈관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줄기를 보면 때론 신비하게도 보인다. 

팽나무에 끌려 성곽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진휼청이 보인다. 단청을 입히지 않는 건물로 여염집의 아낙처럼 찾아온 이를 향해 다소곳이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다. 진휼청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던 관청 건물로 곡식을 빌려주고 거두어들였다. 관청 건물이라고 하지만 흔히 보던 옛 건물과 크게 다를 게 없어 안내문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하던 곳인지 알지 못한다. 성곽에 서면 진휼청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건 내려다보이는 오천항의 경치이다. 

오천항에는 뜻밖에 배가 많다. 오천항은 바다 양쪽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고, 수심이 깊어 선박 통행이 자유로운 서해안 천혜의 항구이다. 오천항은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역을 하던 곳으로 그 역사가 깊다. 회이포로 불렸던 오천항은 예나 지금이나 이쪽 지역에서는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해온 항구이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일대의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충청 수영성 앞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많다. 마치 옛 충청 수영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을 보면 군사 지식이 없어도 왜 이곳에 충청 수영을 두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충청 수영성에서 보는 경치의 절정은 영보정이다. 영보정은 충청 수영성에서도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높은 곳에 있으면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이든 일단 경치에서 한 수를 먹고 들어간다.


 



영보정은 연산군 때 수사 이량이 지었다. 영원히 보존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충청 수영성을 대표하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37년 만에 복원했다. 복원한 건물이라 품은 세월의 무게는 무겁지 않아도 그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운치에 앞서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에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이것은 꼭 규모가 커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무래도 충청 수영성이라는 군사기지 안에 있는 건물이라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영보정에서는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그 자체로도 멋진 경치인데, 거기에 서해의 아름다운 해넘이까지 보태진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절경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때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경치를 보였을 게 틀림없다. 경치가 얼마나 멋있었으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말을 말했을까. "세상에서 호수, 바위, 정자, 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렇게 칭찬했던 영보정을 올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마룻바닥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바닥에 숨어있던 차가운 겨울 잔해가 전율을 일으킨다. 밖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보정의 내부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크고 넓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굵은 기둥들은 마치 수군이 도열해 있는 것처럼 칼같이 줄을 맞추었다. 굵직한 기둥들 사이로 수영성에 얽힌 세월의 이야기를 품은 바람이 자유롭게 쏘다닌다. 영보정에서 보는 경치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영보정의 키만큼 높아져서 그런지 보이는 경치가 더 선명하고 진하게 다가온다. 

짠 내음을 품은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 시절의 수군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과 바다는 제자리에서 지난 역사를 모두 다 끌어안았다. 끝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흐른 게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이 무한한 공간 속에 함께 머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생각을 하면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미닫이문만 열어젖히면 과거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질 것 같다.



차를 세워 둔 곳이 영보정 뒤편이다. 달려왔던 길 건너편에도 옛 건물이 보인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길을 건넌다. 그곳에는 역대 충청 수사들의 업적을 기린 비석들이 줄지어 서서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충청 수사의 집무실이었던 공해관을 드나드는 내삼문이 뻘쭘하게 찾아온 이를 쳐다본다. 이것을 보고 팥소 없는 찐빵이라고 해야 하나. 주인공인 공해관은 없고 드나드는 문만 덩그러니 있으니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대문이 없어도 건물만 온전히 남아 있으면 크게 아쉽지 않은데, 건물 없이 문만 있으니까 영 휑하다.  

내삼문 뒤로 보이는 장교청이 충청 수영성에서 보는 마지막 볼거리이다. 장교청은 그 용도가 영 헷갈린다. 건물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객사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면 수영의 간부들이 회의하던 곳이라고 나온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다른 건물과 달리 건물에 비해 삼면이 툭 터진 마루가 유난히 길쭉하다. 마루 한쪽 끝에는 방이 두 개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작지만,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절대 작지 않은 방이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날씨가 풀렸어도 부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계속 내놓고 다녔던 손이 다 시리다. 얼른 차에 가려고 도롯가에 선다. 차들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문다. 무심코 달려가는 차들이 시시때때로 충청 수영성의 허리를 자른다. 길을 건너려고 잠시 서 있는 동안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충청 수영성의 갈라진 시간과 공간을 이어줄 수는 없을까? 충청 수영성을 옛 모습 그대로 되살릴 수는 없을까? 충청 수영성 앞바다에 거북선을 띄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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