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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Oct 11. 2020

오월의 도화지에 초록으로 수채화를 그린다

사진 욕심이 있는데 영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기초를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애당초 소질이 없는 건진 몰라도 사진을 잘 찍지 못한다. 사진을 찍으면 다들 보정작업을 한다. 사진 실력이 그런데다 포토샵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보정작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모든 게 그렇듯이 하는 과정에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의가 높아진다. 사진 실력이 늘 제자리를 맴도니까 보정작업 하는 것도 시큰둥하다.

   

그나마 하는 보정작업 중에 유독 신경 쓰는 게 채도 조정이다. 채도에 관해서는 조정을 넘어 늘 욕심을 부린다. 특히 신록이 가득한 계절에는 끝없이 욕심을 부린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면서도 조정값을 올린다. 이 계절의 초록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싶어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부린다. 그만큼 연두와 초록의 경계를 넘나드는 오월의 나뭇잎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고 사랑한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오월의 색감은 카메라와 포토샵을 가지고 흉내 낼 수 없다. 

   

흔히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일 년 열두 달 중에 왜 하필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할까? 남들이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았지,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몰랐다. 이참에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 인터넷에도 딱 이거라고 설명하는 자료는 없다. 노천명 시인의 “푸른 오월”이라는 시에 나오는 “계절의 여왕 오월”이라는 시구에서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제일 신빙성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계절이 변하는 자연 현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월은 자연의 생명력이 가장 도드라지는 계절이다. 겨우내 죽은 듯이 서 있던 나무에서 연둣빛 어린잎들이 돋아난다. 또 오월이면 꽃 중의 꽃이라는 화려한 장미가 핀다. 약동하는 생명력과 그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어 오월이 계절의 여왕이 아닐까 싶다. 오월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이유를 갖다 붙여 조금 민망스럽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어수선한 세월이지만 그래도 시간과 계절은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간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스스로 자가 격리의 시간을 보내다 평택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볼 수 없는 친구를 볼 겸 바람 쐬러 집을 나선다.


혼자 떠나는 여행길이 늘 그랬듯이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뻥 뚫린 길을 달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즐길 수 있었던 일상의 이런 즐거움이 이젠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한 것처럼 누려왔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친구한테 가기 전에 먼저 오산 물향기 수목원을 간다. 몇 해 전,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과 여행지를 상의할 때 누군가 제안했던 곳이다. 그때는 다른 곳을 갔지만, 물향기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머릿속에 남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 툭 터진 공간이라 좋고,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평택 가는 길에 들리려고 진즉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5월인데 한낮의 날씨는 벌써 여름을 무색하게 한다. 차창을 내리지 않으면 차 안은 사우나나 다름없다. 벌써 이러는 것을 보면 올여름은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안 그래도 방송에서는 올여름에 최고의 폭염이 예상된다고 하는데 미리 맛보기를 보여준다. 더위를 참을 수 없어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에어컨을 켜고 기분 좋게 달린다.

 

요즘 상황이 그래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물향기 수목원에는 제법 사람이 있다. 널찍한 주차장은 많이 비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차들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복잡한 정도는 아니어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도 찬란한 오월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 마음은 어쩌지 못한다. 물향기 수목원의 규모가 자그마치 10만 평이다. 수목원에 들어서면 어디부터 둘러볼지 고민스럽다. 오른쪽? 왼쪽? 


어렸을 때라면 손바닥에 침을 올려놓고 두 손가락으로 내리쳐 침이 튀는 방향으로 갔을 거다. 나이 먹어 그럴 수는 없어 잠시 망설이다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행하면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대부분 오른쪽을 선택했다. 여행자만의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편하고 자연스러워서 매번 오른쪽을 택한다. 

   

얼마 가지 않아 숲속의 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올라간 굵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따가운 햇볕이 여기서는 맥을 쓰지 못한다. 어스름한 그늘로 뒤덮인 숲속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숲속에는 군데군데 쉴 수 있는 나무 탁자들이 놓여 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번거로운 세상일을 잠시 제쳐놓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이 가득하다.

 

수목원을 둘러보는 중간에 이곳을 만났다면 수목원 구경은 그것으로 끝났을 거다. 아직은 시작도 하기 전이라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수목원을 둘러보고 나올 때 마음껏 즐기자고 다짐을 한다. 오월의 수목원은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초록이 지천이다. 연두와 초록이 가득한 나무 사이를 걷는 사람 모습은 한 장의 그림엽서이다. 수시로 이정표가 나오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초록과 그늘이 가득한 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물향기 수목원은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한 수목원이다.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물과 관련된 습지생태원이나 수생식물원과 호습성 식물원이 있다. 일부러 찾아다니기보다 초록의 길을 걷다가 만나면 둘러볼 참이다. 물향기 수목원에는 이것들 말고도 여러 주제원이 있어 일일이 다 기억하기 어렵다.

 

늘 그랬듯이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여행을 좋아해서 굳이 세세한 것까지 다 보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수시로 바뀌는 경치와 초록의 노골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습지 경치는 물향기 수목원만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쉽게 내어놓지 않고 선택된 이들에게만 보여주려고 숨겨놓은 것 같다. 같은 초록이라도 밝은 햇살을 고스란히 받은 초록과 어둑한 그늘 속에 숨겨진 초록의 경치가 다르다.

 

어스름한 그늘 속에 갇힌 잔잔한 수면위에 반영된 짙은 초록의 모습은 또 다른 초록의 범위를 만들어 놓는다.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진 습지의 한쪽은 구멍이 뚫려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확연히 구분되는 어둠과 밝음의 경치와 물 위의 반영이 어우러져 습지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어디선가 오리 한 마리가 슬그머니 나타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고 장식물처럼 한곳에 멈춰 선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어 아주 도도하게 보인다. 이 습지의 주인이 저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가만있던 녀석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얄밉게 요리조리 카메라 앵글을 빠져나간다. 몇 번을 헛손질하게 하더니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풀숲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녀석한테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다. 

초록에 이끌려 쉬지 않고 걸었더니 발바닥이 아프다. 때맞추어 한적한 곳에 그늘이 가득한 벤치가 보인다. 물향기 수목원을 얼마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수목원 구경은 끝이다. 수목원 입구에서 보았던 쉼터와는 분위기가 다르지만, 사람이 없어 조용하게 보내기는 이곳이 더 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 사람은 오월의 초록에 취해 벤치에서 꿈속을 헤매고 있다. 나른한 오후에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늘 너머 저편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르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한가로이 떠 있다. 그 하늘을 배경 삼아 서 있는 커다란 나무는 어느 여름날 시골에서 보았던 것처럼 눈에 익은 모습이다. 분명 처음 본 것인데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데자뷔 현상이다. 그만큼 눈앞에 한가로운 경치가 마음에 들고, 또 이런 경치를 보고 싶었던 바람이 잠재의식 속에 있었나 보다. 그 경치가 오월의 도화지에 멋진 수채화로 그려졌다.

      

초록의 잎사귀들은 따사로운 햇살을 자양분 삼아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진다. 하룻밤만 자고 나도 잎사귀들은 몰라보게 쑥쑥 자란다. 그만큼 초록의 색도 짙어간다. 아직은 농염한 초록이 아니라 한결 더 보기 좋다. 밝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나뭇잎은 가느다란 잎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모습은 온몸이 떨리도록 아름답다. 

밀려드는 나른함과 함께 초록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이 부러워 자꾸 눈길이 간다. 계속 있다가는 드러누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수목원 밖의 어수선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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