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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Dec 04. 2023

다시 한번 예전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이것도 나이를 먹은 탓인가. 여행하면서 무언가를 보면 있는 그대로의 느낌에다 자꾸 추억을 끌어들인다. 때론 의도적일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의 추억에 빠진 나를 발견한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끄집어낸 추억 속에 빠져 있으면 마음이 따스해지고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인다. 이런 내게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이런저런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추억을 꺼내서 즐기라고 한다. 이제껏 기억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추억을 되살려 보는데 아쉬운 건 그저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상상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그동안 흘러가는 세월에 얹혀살다 보니까 잊어버린 지난날의 반가운 것들이 너무 많아 추억의 시간 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다 오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넘나든다. 타임머신을 이렇게 자주 탔으니 나중에 청구서 금액이 꽤 나올 것 같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들어서 담벼락에 그려진 포스터를 보는 순간, 얼마나 반가웠던지 금방 추억에 빠져들었다. 담벼락에 그려진 포스터는 1972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여로’였다. 여로의 주인공인 장욱제 씨와 태현실 씨의 모습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옛날 전농동의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를 다시 만난 것처럼 무척 반가웠다, 요즘도 시청률이 높은 인기 드라마가 있지만 여로만큼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가 있을까 싶다. 


그 당시의 시청률이 무려 7~80%였으니까 여로를 보지 않았거나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때는 여로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여로가 시작되면 온 동네는 물론 도시가 조용했다. 그때는 방영된 여로의 내용을 모르면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 끼지를 못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게 했던 여로는 그만큼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때 온 가족이 함께 여로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한 집에서 부대끼며 뒹굴었던 형제들이 이젠 다들 흩어져 산다. 아이들보다 여로에 더 울고 웃으시던 부모님은 하늘의 별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어렵고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이나 이웃 간에 사랑과 정은 풍요로운 지금보다 훨씬 더 넘쳤다.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겨울날 구들목처럼 따스해지고, 왠지 모르게 목이 뜨끈해진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더 아쉽고 그립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손뼉을 쳐주고 싶다. 6~70년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도 전 국민이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풍요는 그때의 경제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낡고 오래된 것들을 빨리 부수고 새로 지어야 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이젠 새로 짓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옛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건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정신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교육적으로도 그렇지만, 지금의 풍요 속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옛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돈의문 박물관 마을처럼 우리의 옛것을 복원해놓은 곳이 더러 있다. 그렇지만 돈의문 박물관 마을처럼 실제의 동네 한 곳을 추억의 공간으로 복원한 곳은 흔치 않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함께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어 건물을 철거한 후에 근린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울시는 역사적 가치가 있고, 근현대의 서울 모습을 품고 있는 이 동네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계획을 변경하면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탄생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아이들이 우리의 옛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 무척 유익한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젊은 부모들은 지난날의 우리 모습을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공감을 나눌 수 있다. 나이 든 세대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어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이다.

 

뜻밖에 외국인도 많이 보였다. 그들도 이렇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옛 모습을 꽤 진지하게 구경한다. 어떤 외국인은 내국인보다 더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진지함과 관심의 정도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마을 안에 있는 한옥에서 우리의 전통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아주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꾸 추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의 모든 게 지난날 우리의 모습이라 어쩔 수가 없다. 어떤 건 보자마자 눈물이 찔끔 나도록 반가운 것도 있다. 그렇다 보니 지난날의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지만, 차마 다 쓸 수가 없다. 오늘은 글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다. 


어린 날 추억의 장소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이발소다. 그 이발소가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도 있다. 요즘은 이발소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듯하다. 예전 분위기의 이발소는 이제 더는 찾을 수 없다. 이발소의 영역을 미용실이 잠식했고, 그나마 남은 남자들만의 이발소는 가맹점 브랜드가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맹점 이발소에서는 예전의 추억이나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마을에 있는 이발소는 사실 살짝 엉성한 느낌이다. 그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에 옛날의 이발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분위기만큼은 옛 느낌을 풍겼다. 이발소에 놓여 있는 여러 소품 중에서 정말 반가웠던 건 머리 감길 때 사용했던 물 조롱이다. 이발소 한쪽 귀퉁이에 버려진 듯이 놓여 있는데 그것이 옛 추억의 이발소로 데려가는 타임머신의 티켓이 되었다, 여름에는 괜찮았지만, 겨울에 뜨거운 물을 아끼려는 이발소 아저씨가 물 조롱에 뜨거운 물은 조금 넣고 찬물을 많이 넣어 머리에 부으면 머리는 물론 등골까지 서늘했다. 


어렸을 때 이발소에 가면 제일 신기했던 게 면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발소 아저씨가 비누통에서 거품을 낸 면도솔을 난로 연통에 쓱쓱 문지르는 게 신기했었다. 추운 겨울에 면도하는 손님에 대한 배려인데. 그땐 그게 이발소 아저씨만의 특별한 기술인 줄 알았다. 아저씨가 문지르는 곳은 정해져 있어 연통의 그 부위는 누렇게 변해있었다.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면도할 나이가 되었을 때는 각자가 면도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그 바람은 그때의 연통 자국처럼 누렇게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서울미래유산관에서 반가운 걸 발견했다. 전시물 중에 작고한 가수 배호 씨의 “돌아가는 삼각지” 엘피판이 있었다. 그것과 똑같은 엘피판이 예전 우리 집에도 있었다. 아버지가 서재로 사용했던 예전 집 2층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전축이 있었다. 그때의 전축은 요즘 한쪽 문 냉장고를 옆으로 누여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전축 한쪽에는 엘피판을 넣어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그 엘피판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가수 하춘화 씨가 6살인가 7살 때 녹음한 엘피판도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까지 있었다면 값을 떠나 아주 귀중한 소장품이 되었을 텐데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전축 앞에서 이런저런 엘피판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던 까까머리의 내 모습이 눈앞을 스쳐 갔다. 안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잠깐만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함께…


추억의 오락실에서는 아빠와 아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 게임에 푹 빠졌다. 아이는 옛날 게임이 신기해서 재밌을 것이고, 아이 아빠는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게임이라 신이 났을 거다. 그들의 뒷모습이 재밌고 정겨워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한 게임이 어떤 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예전에는 종로에 학원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때 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가게 앞에 자동차 게임기가 있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게임기라고 하기에 조잡하고 단순했지만, 그땐 다들 좋아하는 게임이었다. 동전을 넣으면 S자 굴곡의 길이 이어져 나왔고, 그 길 위로 모형 자동차를 핸들로 운전해서 가는 게임이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리지만. 갈수록 빨라져 핸들을 좌우로 미친 듯이 돌려대는 재미와 스릴이 있었다. 자주 하니까 나중엔 나오는 길 형태를 외우게 되어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그게 있었으면 한번 실력 발휘를 해봤을 텐데, 이곳에 있는 게임기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 보이지 않았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규모가 커서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생활공간이 거의 다 있다. 그 많은 추억거리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는 게 추억의 음악다방이다. 음악다방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을 거쳐온 사람이면 누구나 갔던 곳이다. 마을에 있는 음악다방의 분위기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음악다방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DJ 뮤직박스만큼은 옛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음악다방에서 보냈던 젊은 날의 이야기를 쓴다면 아마 두툼한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인생의 최고 황금기였던 날들이었기에 쌓이고 쌓인 추억이 그만큼 크고 많을 수밖에 없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추억여행에 빠져 잠시도 발걸음을 쉬지 못했다. 뻐근해진 다리와 은근히 밀려드는 피로감을 달랠 겸 다방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예전에 음악다방은 음악이 듣고 싶어 찾기도 했지만, 젊은 날의 차고 넘치는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 수없이 드나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리다가 그것도 심심하면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DJ 박스로 보냈다. 그땐 그게 멋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DJ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끈적끈적했다. 그래도 잘나가는 DJ들의 인기는 유명 연예인을 뺨칠 정도였고, 음악다방 매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귀한 존재였다. 기왕 복원한 거 커피도 팔면서 신청곡을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다방에 대한 추억이 그리운 사람들이 더 많이 찾지 않을까 싶었다. 


탁자 위에 사람들이 써놓은 신청곡 용지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쓴 것도 있지만, 예전 젊은 날의 추억을 그리며 써놓은 내용들이 많아 계속 넘겨보았다. 그중에서 가슴에 와닿는 신청곡 용지를 하나 발견했다. “다시 한번 예전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하면서 그 당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를 신청곡으로 적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감미로운 목소리의 노래가 머릿속에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다시 한번 예전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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