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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Feb 05. 2024

어머니가 아픈 배를 문질러 주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목차 2권

 내경편 4권

 외형편 4권

 잡병편 11권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 등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뜬금없이 뭔가 싶을 거다. 이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 국내외 180여 종의 의서를 참고해서 모든 의학지식을 정리해 놓은 의학서이다. 의학이론과 처방에 대한 해설은 물론, 병의 증상에 따른 약물 처방과 침구법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렇기에 우리의 국보로 지정이 되었고, 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TV를 바보상자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자연의 다큐멘터리나 살아보지 못한 시대와 인물에 대한 역사 드라마는 재미와 함께 그 시대와 인물을 이해하는 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드라마의 경우, 시청자들의 재미와 관심이 우선이다 보니까 논픽션과 픽션이 혼재되어 있어 역사의 진실이 자칫 왜곡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역사를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면이 있다. 


1999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허준”은 대한민국 역대 사극 중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국민 드라마였다. 허준 역을 맡았던 배우 전광렬 씨는 지금까지도 허준이라는 캐릭터로 굳어져 있다. 요즘은 TV에서 자주 볼 수 없지만, TV에 그가 나오면 허준부터 떠오른다. 다들 그랬지만, 나 역시도 드라마 허준을 열심히 보았다. 그 때문에 허준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직장이 강서구에 있다. 차를 가지고 출퇴근하는 날에는 지나는 길에서 허준박물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게 된다. 사실 그 이정표를 볼 때마다 고개가 갸우뚱했다. 강서구하고 허준 선생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곳에 허준박물관이 있는 거지? 그러던 어느 날,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인터넷에서 허준박물관을 찾아보았는데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허준 선생은 그 시대의 양천현인 강서구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강서구에 허준박물관이 있는 건 당연하고 또 있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까 허준박물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별다른 일이 없는 주말을 맞아 강서구를 둘러보기로 했다. 강서구에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았는데 뜻밖에 볼거리가 많았고, 그중의 하나가 허준박물관이었다. 허준박물관이라고 하니까 왠지 모르게 예스러운 모습이 상상됐지만, 막상 도착한 허준박물관은 세련되고 멋스러웠다. 박물관 뒤쪽에는 대한한의사협회 건물이 있어 협회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고 강서구에서 건립한 공립박물관이다. 


오전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렸다. 날씨가 이래서인지는 몰라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을 많이 찾았다. 우리의 옛것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까? 싶었는데 뜻밖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 살짝 놀랐다. 또 그만큼 보기 좋았다. 


허준박물관에 들어서면 한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향기 마케팅이 있던데, 그것처럼 한약 냄새가 허준박물관을 찾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은은한 한약 냄새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꼭 익모초를 달이셨다.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약탕기를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부채질하면서 정성껏 달이셨다. 어머니가 익모초를 달이는 날은 온 집안에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어떻게든 안 먹으려고 온갖 잔머리를 다 굴렸다. 그래봤자 어머니의 손바닥 안이었지만 말이다. 


익모초 달인 것을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쓰다. 철부지 꼬맹이가 그 쓴맛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눈 딱 감고 먹은 건 어머니의 강압과 함께 달콤한 사탕 때문이었다. 코를 틀어막고 억지로 마시고 나면 어머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면서 사탕을 입에 넣어 주셨다. 그때마다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약은 써야 몸에 좋은 거야!”


요즘은 한약을 집에서 달여 먹지 않는다. 세월이 좋아 한의원에서 먹기 좋게 달인 한약을 개별로 포장해서 준다. 예전에는 한의원에서 하얀 종이에 싼 약재를 가져와 집에서 달여 먹었다. 그때마다 집안은 한약 냄새가 가득했다. 그런 시절을 살아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맡아보는 한약 냄새가 참으로 정겨웠다. 


허준박물관은 허준 기념실을 비롯해 동의보감실, 약초약재실, 의약기실의 전시실과 함께 다양한 체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있는 전시물을 꼼꼼히 읽고 살펴본다면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라도 한의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허준박물관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기보다 여태 잘못 알고 있던 걸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렇기에 이런 박물관이 필요하고, 또 박물관을 보아야 할 이유가 된다. 동의보감은 의서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국보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금껏 동의보감은 허준 선생이 직접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경험과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한 의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니까 동의보감은 그 당시 국내외 많은 의서를 참고해서 모든 의학지식을 정리한 의학서였다. 수많은 약재에 대한 자료와 함께 병의 증상에 따른 처방과 침구법을 정리한 의서이자 한의학 대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한 사람의 집념과 열정과 노력으로 완성하였으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왜 허준 선생을 의성(醫聖)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도 즐겨 복용하는 동의보감 속의 유명한 탕제들이 있다. 낯익은 십전대보탕, 총명탕, 쌍화탕, 경옥고의 약제들이다. 총명탕은 지금껏 먹어본 기억이 없고, 경옥고는 두어 번 먹어봤다. 십전대보탕과 쌍화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어 익숙하다. 특히 쌍화탕은 몸살 기운이 있거나, 몸이 찌뿌둥하면 일부러 찾아 먹는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자기 전에 따뜻하게 데운 쌍화탕을 마시면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개운해진다.


전시물 중에는 요즘 보기 어려운 예전의 물건들이 많다. 그중의 하나가 약장기이다. 요즘은 한의원도 일반 병원처럼 꾸며져 있어 한의원에 가도 약장기 보기가 쉽지 않다. 약장기는 각종 약재를 담아두는 장롱으로 약재가 들어있는 서랍이 수없이 꽂혀있다, 


예전에는 한의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약장기였다. 어렸을 때는 작은 서랍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약장기가 무척 신기하게 보였다. 그 많은 작은 서랍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했고, 그 안에는 신비한 것들이 들어있을 거로 혼자 생각했었다. 


많은 전시물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끈 건 배밀이였다. 배밀이라는 걸 처음 보았고, 지금껏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배밀이의 생김새와 이름을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배밀이는 주전자 뚜껑처럼 생겼지만, 주전자 뚜껑처럼 크지는 않다. 주전자 뚜껑이 날렵하다면 배밀이는 뭉툭하다. 배밀이는 백자와 백자청화로 되어 있는데, 손잡이와 뚜껑 부분에 글자가 쓰여 있다. 



배밀이를 보니까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어려서 배가 아프면 어머니는 똑바로 눕게 한 다음 “엄마 손은 약손 아기 배는 똥배” 하시면서 당신의 손바닥으로 둥글게 돌려가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아픈 배가 정말 거짓말처럼 나았다. 


그 옛날부터 배밀이가 있었던 걸 보면 그때 아픈 배가 왜 나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머니가 해주셨던 배 문지르는 걸 내 아이들에게도 해주었다. 배를 문지르는 게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해주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해주었을 뿐이다. 내가 어려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도 아팠던 배가 나았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가 피어올랐다. 


첨단의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 그 옛날 방식이 그대로 사용되고 또 효과가 있는 걸 보면 동의보감이 얼마나 대단한 의서이고, 그것을 집필한 허준 선생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논어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의 세태는 옛것을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온고지신처럼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알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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