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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한둘이 아니다

by 레드산


순천에서 처음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게 2013년이었다. 이래저래 사는 게 바빠 모르고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2023년에 순천에서 다시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다. 시간이 오래되긴 했어도 처음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그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국제정원박람회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건 물론 조금은 생소한 박람회여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때는 우리 땅이 비좁다고 생각하면서 전국을 여행할 때였다. 그런 때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정원박람회를 놓칠 수 없어 순천으로 갔다. 처형이 사는 고창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찌감치 국제정원박람회장으로 갔는데, 박람회장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결국 박람회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길가에 차를 세워놓은 채 시간을 보내다 그냥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해의 국제정원박람회 모습은 TV를 통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았다. 그래서인지 국제정원박람회는 물론 순천만 국가정원에 대한 기억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금방 잊혔다.


겨울도 막바지에 들어선 주말에 순천을 찾았다. 오랜만에 모인 처가 식구들과 함께 순천 낙안읍성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낙안읍성을 거쳐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갔다. 이때는 순천만 국가정원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정원역에서 스카이큐브를 타고 순천만 갈대숲에 갈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순천만 국가정원은 그냥 지나치는 경유지였을 뿐이었다.


정원역으로 가면서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정원역은 무엇이고, 스카이큐브는 또 언제 생긴 건지?’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을 때, TV로 스쳐 가듯이 보았기 때문에 순천만 국가정원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또 10년이 지나 다시 국가 정원박람회가 열리면서 순천만 국가정원이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니까 정원역이나 스카이큐브가 궁금한 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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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주차장에서 정원역으로 가는 동안에 보이는 순천만 WWT 습지를 포함한 주변 풍경은 이곳을 찾은 이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예약한 스카이큐브 탑승 시간이 있어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세련되게 지어진 정원역에서 친절한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스카이큐브에 탑승했다. 출발하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하천 너머의 국가 정원 모습에서는 그나마 눈에 익은 경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호수정원에 있는 봉화 언덕에 제일 먼저 눈길이 갔다. TV 화면에서 여러 번 보았던 호수정원의 봉화 언덕은 여행자에게 있어 순천만 국가정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저걸 봐야 하는데….’ 봉화 언덕 다음으로 눈길을 끈 건 스페이스 브리지였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스페이스 브리지는 다리지만, 멀리서 보면 긴 회랑처럼 보였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둥그스름한 건축물이 있다. 순천만 국가정원의 슬로건이 “우주인도 놀러 오는 순천, 순천만 국가정원”이다. 둥그스름한 건축물은 순천만 국가정원에 놀러 온 우주인의 우주선처럼 보였다.


정원 역에서 스카이큐브를 타면 약 4.6km 떨어진 순천만 역에 도착한다. 순천만 역에서는 순천만 갈대숲으로 가는 갈대 열차와 연결된다. 스카이큐브는 케이블카와 비슷한 모양이라 타는 재미와 함께 스쳐 가는 주변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순천만 국가정원과 갈대숲은 순천을 대표하는 구경거리이다. 이것을 하나로 이어놓은 건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만 갈대숲을 구경하면서도 순천만 국가정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순천만 갈대숲을 보고 다시 정원 역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쉬기 위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카페도 좋지만, 순천만 국가정원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어 갈등했다.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까, 정원 구경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겨울은 겨울대로의 멋과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먼 순천까지 왔는데, 그냥 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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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순천만 국가정원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급해져 부지런히 스페이스 브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이스 브리지는 멀리서 보았을 때도 독특하고 멋스러웠지만, 내부는 정말 잘 꾸며져 있어 그 자체로 멋진 볼거리였다.


175m의 스페이스 브리지는 순천만의 자연 생태계를 화려하고 실감 나는 영상물로 보여주었다. 또 영상물과 어울리는 조형물이 있어 웬만한 전시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기 좋았다. 우주의 미래 에너지와 순천만의 생명 에너지가 만나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탄생했다는 안내문처럼 정말 신비스러울 만큼 보기 좋았다.

스페이스 브리지를 구경하는 동안 잿빛 하늘에서 느닷없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잠깐 오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눈은 작심한 듯이 내렸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멋진 볼거리가 가득한 스페이스 브리지에서 눈 내리는 경치까지 보는 건 이 계절 최고의 멋이자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혼자라도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락눈에서 함박눈으로 변한 눈을 맞으며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은 다른 계절 내내 펼쳐놓았던 초록의 잎사귀와 색색의 꽃들을 제 안에 갈무리한 채 숨죽여 쉬고 있다. 이 계절의 정원 모습은 어디라도 조금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 단조로운 경치에 갑자기 내리는 눈이 있어 순천만 국가정원의 경치는 더욱 풍성해졌다.


겨울이라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눈 내리는 경치를 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순천만 국가정원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상기되었다. 젊은 연인들은 이제 곧 멀어져갈 겨울 속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며 인생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더욱더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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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정원에 있는 둥근 봉화 언덕은 TV에서 볼 때마다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여행자는 봉화 언덕을 순천만 국가정원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한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봉화 언덕으로 가는 다리는 다닐 수 없게 막아놓았다. 봉화 언덕 정상에서 순천만 국가정원을 굽어보고 싶었고, 또 그 경치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렇긴 해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봉화 언덕의 경치도 역시나 멋스러웠다. 특히 호수와 언덕 그리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어우러져 기하학적인 독특한 멋과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호숫가에 있는 벤치는 눈이 쌓여 젖었다. 벤치에 앉아 호수정원과 봉화 언덕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행의 들뜬 기분을 잠시 내려놓고 차분하게 경치와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이것 역시 살짝 아쉬웠다. 여행의 참맛은 즐거움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평온함을 얻을 수 있을 때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생각지도 않게 순천만 국가정원을 보게 되어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아쉬움이 순천만 국가정원을 다시 찾아야 할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아쉽게만 생각할 건 아니었다.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외에서 딱히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때문에 은근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잠시 눈도 피하고 쉬어갈 겸 서둘러 식물원으로 갔다. 식물원에 들어서자마자 눅눅한 습기와 식물원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훅하니 달려들었다. 계절을 잊은 채 푸름을 보여주는 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있어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식물원 한쪽에는 물을 쏟아내고 있는 거대한 폭포가 있어 겨울이라는 계절을 잊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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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식물원에는 꽤 많았다. 날씨 때문인지 여행자처럼 다들 식물원으로 구경 겸 피난을 온 것 같았다. 그나저나 묵직해진 다리를 잠시 쉬어볼 생각이었지만, 초록의 향연에 정신이 팔려 계속 돌아다녔다. 그래도 힘들 줄을 몰랐으니 이게 다 식물들이 내어준 좋은 기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식물원 구경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쏟아붓던 하늘이 짐짓 모른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가족과 만나야 할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순천만 국가정원을 나왔다. 굳이 자신과 약속하지 않아도 푸르름이 가득한 계절에 다시 와서 순천만 국가정원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순천만 국가정원을 끝으로 1박 2일 순천 여행이 끝났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순천의 모든 것들이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순천 사람들의 친절함이었다.


정원역과 갈대 열차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식당과 약국에서 만났던 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친절했다. 그동안 전국 곳곳을 여행했다. 많은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친절했지만. 이번 순천에서 만난 분들의 친절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꼭 한마디 남기고 싶었다. 여행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만이 전부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여행은 더욱 풍성하고 완벽해진다. 순천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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