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침묵

by 홍사유

고독이란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 나의 삶에서 어느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고 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오랫동안 서울에 살던 내가 결혼을 하며 읍 단위의 지역으로 옮겨 갔고, 출산을 했고, 남편은 늘 바빴으며, 우린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어렸다. 아이를 갖고 낳은 것은 친구들 중 오직 나뿐이었으므로 타지에서 홀로 아이를 키워내는 나의 기쁨이나 절망에 귀를 쫑긋 세워 들어줄 이는 없었다. 친구들은 청춘이었다. 만삭과 출산을 거치며 붓고 꼴 보기 싫게 변한 내 체형과는 달리 그들의 몸매는 날렵했다. 짧은 바지를 입고 활력이 샘솟는 반짝이는 거리를 자지러지게 웃으며 사뿐히 걸었다. 그건 그들의 일상이며 숙제였다. 나는 바퀴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경운기가 지나다니는 길에서, 사납고 낯선 억양으로 나를 주눅 들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깊은 곳에서 흩어졌다가 뭉쳐지고 녹아내리다가도 기어코 거슬러 올라와 이내 단단해지는 그 무언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오랜 침묵은 짙은 고독을 낳았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나의 고독이 시작된 것인가?


어릴 적에 나는 00골이라고 불리는 작고 좁은 마을에 살았다. 집 뒤에는 논과 냉이꽃, 닭장과 도라지꽃, 살구나무와 개울, 도깨비풀과 메뚜기, 덫과 참새가 살고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길은 마을 뒤 야산까지 이어졌고 야산의 반대쪽으로 한참을 걸어 고요한 언덕 두 개를 넘으면 비로소 북적북적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에 닿을 수 있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마저도 20년을 훌쩍 넘겨 닭장이며 살구나무며 큰길 따위는 흔적도 없이 콘크리트 아래 으스러졌고 희미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만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 시절이 그렇듯 집 밖에는 늘 아이들이 내는 노란 소음이 녹색 바람결에 녹아들고 이 집 저 집 각자의 사정들이 늘 열려있는 현관문을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나의 엄마도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 사정들이 자유로이 떠돌 수 있도록 입을 빌려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지금은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언니의 집에 엄마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아마 그 언니와 뭐든 했을 것이다. 다만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달고나를 만들겠다고 설치던 언니가 국자를 까맣게 태워먹은 일이다. 그건 조금 위험한 일이지 사실 뭐 그리 대단히 충격받을 일은 아니었음에도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엄마의 국자를 태워먹다니. 세상이 뒤집힐만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생각한 나는 곧장 언니의 엄마에게 가 조금 전 일어난 일을 일러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별일이 아니란 듯 차분히 "그랬니?"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언니를 따끔히 혼내고 언니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눈물로 사죄해야 함이 마땅했으니 나는 정의로운 일을 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내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언니는 나를 비난했으며 곧 두 번째 충격이 내게 전해졌다. "야, 너는 꼭 그렇게 치사하게 일러바쳐야 되냐?"라고 나의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침묵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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