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심 Apr 09. 2020

청년수당만큼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열번째 밑줄


회사를 퇴사하고 몇 달 간인가 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디자인 업무를 보고 있었으므로 될 수 있으면 잠깐 맡는 업무라도 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발적이면서도 높은 강도의 업무 때문에 이전보다도 삶의 질은 낮아졌다.(중략)


모든 것이 사치였다. 정규직에서의 후퇴는 인생의 후퇴를 의미했다. 나는 모든 것에서 한 발자국 이상 물러서야 했다. 사치는 치사하다. 백수는 아플 때도 이유가 필요하다. “네가 뭘 한다고 아프니?” 생명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아플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팠고, 무엇인가 하느라 피곤했다.(중략)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는 직원들이 사무실에 반려동물을 데려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일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거의 모든 동물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 사실을 숨기느라 매일 약을 달고 살았다. 숨길 수 없는 나의 재채기는 만성 비염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제 그 병명은 나의 질병이 되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사무실 휴지를 너무 쓰면 미운털이 박힐까, 개인 휴지를 항상 지참하고 다녔다. 코가 까져 로션을 발라야 했다. 그것이 패기인 줄 알았다. 나는 그때 그만큼 간절했다.


그 간절함이 어디로 갔을까. 새로 면접을 본 기업에서 입사 시험을 치러야 했다. 겨울이었다. 아무런 난방기구도 없는 방에서 몇 면접자들이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작은 광고 시안을 만들었다. 추위에 손이 곱았다. 맞은 곳은 뜨거워진다. 이미 두들겨 맞은 내 뜨거운 인생을 수습해야지.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을 내려치면서, 나는 면접을 마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무엇이 눈에 밟혔던가. 면접을 일요일 오후에 잡는 회사의 뻔뻔함은 아니고, 이미 그 추운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직원들의 발간 얼굴은 아니고, 시험을 치르면서도 연봉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던 담당자의 입도 아니고, 너무 멀었던 그 거리에 쌓인 눈들도 아니면, 나는 무엇이 눈에 밟혔을까. 합격 통보를 고사했다. 나는 다시 책을 펴고 인터넷 대학의 강의를 들었다. 내 이름 앞에 아무런 완장도 가지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취미는 깊어지면 고통이 된다고 했다. 문학은 배워도, 배워도 나에게 불가해한 것이었다. 내가 적어낸 짧은 이야기에도 긴 비평이 달렸다.


정말로 내가 뭘 했다고 아플까. 자꾸만 나는 시들었다.


- 2019 서울시 청년수당 에세이 모음집 <청년수당만큼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