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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Jan 31. 2020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최근에 퇴사를 하고 심리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뭐든지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했다. 그게 본인을 힘들게 하고 있으니 점차 내려놓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도 했다. 맞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일 벌이고 수습하고 기어코 해낸 다음 뿌듯해하는 성격이다. 뱃살과 스트레스를 얻었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맞다. 갑자기 내가 가장 나다운 특징을 버리라고 하니 처음엔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 다 아는데 나는 그냥 기왕 하는 김에 잘하면 좋겠다 싶은 것뿐이다! 한참이나 이 병적인 성향의 근원을 찾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지나치게 잘해야 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이일 때부터 환경이 어른처럼 스스로 많은 것을 해냈어야 했고 그래서 실수하면 안 돼서 잘하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해 스스로 힘듭니다. 항상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힘든 것을 잘 표현 못합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이래서 내가 힘들었나. 아 그래서 내가 외로웠구나.
IMF가 터진 뒤 부모님은 이런 상황으로까지 치달은 자신의 삶을 가여워하는데 전념했다. 아빠가 술김에 ‘자살하고 싶다’고 말한 이후로 혹시라도 정말 시들어버릴까 봐 어린 나는 원망도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 중학생 주제에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존재 자체에 감사하며 더 나은 내일을 도모해야 했다. 나와 오빠는 공부밖에 답이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자고 결의하고 각자 제 몫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내가 됐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가 됐다.

가끔 천진하고 무해한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만약 내 아이가 생긴다면 나처럼 너무 일찍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 나이에 맞는 속도로 컸으면 좋겠다. 부모님 눈치 보다가 무슨 소리 들을지 뻔해서 혼자 삼키고 삭히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갓난쟁이들이 눈에 띈다. 뽀얗고 말간 얼굴로 아기띠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고것 참 커엽다. 가끔 아기가 시선을 떼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볼 때가 있다. 나는 바둑알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이 작은 녀석이 여드름도 나고 술도 먹고 애인도 생기겠지 하며 속으로 웃곤 한다. 그리고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저는 택이가 저 안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우리 택이도 다른 애들처럼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그렇게 지 속에 있는 감정 있는 대로 티 좀 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 바둑 시작해서 어른들 틈에서 지내다 보니까 화를 꾹 참는 습관이 생겨가지고. 그렇게까지 내성적인 애가 아니었는데. 저는 딴 거 없습니다. 딱 지 또래만큼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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