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첫 번째 월요일, 9시쯤 눈을 떴다. 월요일을 벗어난 것치곤 그렇게 상쾌하거나 개운하진 않았다. 또 요일 감각을 잃어버린 잉여의 삶으로 회귀하는 건가 하는 자조가 스쳤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부정적인 기운을 떨쳐냈다. 행복해지기 위해 자발적 퇴사를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시간에 내가 있어 좋다는 남편을 배웅하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꼼꼼히 화장을 하고 깔끔하게 머리를 정돈했다. 며칠 전 새로 산 겨울 스웨터도 찾아 입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며 눈을 또렷하게 뜨는 연습을 했고 입술도 새로 발랐다. 오늘은 퇴사 전 예약한 정신건강복지센터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예약전화를 걸던 그날도 그랬다. 여유 있고 단정한 말씨로 정신적 질환까진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도움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스스로 진단하고 증명하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정신건강복지센터는 보건소 건물 4층에 있었다. 유독 4층부터 계단에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담실 역시 조망권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창살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안전하다기보다는 관리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인 우울증 검사지를 전해 받았다. 누가 봐도 어디를 체크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만한 문항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자살 시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전혀 아님’을 체크했다.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도 억울한데 내 삶까지 포기해버리면 억울해서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검사 결과, 9점이 나왔다. 10점부터 경증, 20점부터 중증 우울이라고 했다. 단 1점 차이로 나는 우울증에서 탈락했고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게 담당자 소견이었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인데 왜 자꾸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거지? 이상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두 칸으로 눈물샘을 틀어막고 있는 나에게 담당자는 힐링캠프 상담실 이용을 권했다. 그리고 상담 신청을 하기 위해 바로 5층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신청서, 개인정보제공 동의서 양식이 주어졌다. 이름, 주소, 연락처, 가족관계, 정신질환 이력, 심리상담 경험 항목 다음으로 도대체 왜 이곳을 찾게 되었는지 작성해야 했다. 그것도 두 가지나.
첫 번째는 명백했는데 두 번째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 전날 본가에 들렀다가 피임을 하지 말라는 둥 남편이 피는 전자담배가 생식기능에 좋지 않다는 둥 매일 하는 것보다 시차를 두고 하는 것이 더 임신 확률이 높다는 둥 독립한 딸내미 침대 사정에 깊게 관여하는 엄마에게 빽- 소리를 질렀던 것이 생각났다. 안 그래도 퇴사 인사를 하는 내내 차라리 애기를 만들어 육아휴직을 가라는 헛소리에 시달리던 걸 괜히 엄마한테 분풀이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던 참이었다. 여튼 그 덕에 나는 두 가지를 모두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방문 목적
1번 회사 스트레스
2번 가족 관계
상담 선생님은 정부지원사업이다 보니 대기자가 많다고 했다. 한 달 정도 걸릴 거라고. 그 서른 번의 밤을 치르며 나는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쩐지 혼자 힘으로 극복해보라는 미션과 기한이 선고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