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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한슬 May 19. 2021

2005 05 19

아내 충청도행

다섯시에 깨워 달라더니 네시부터 일어나 잠을 못 잔다. 덩달아 나도 잠을 설친다. TV 바둑에 심취하다. 5시 30분쯤 아내가 출발한다. 한숨을 더 자고 혼자 아침을 늦게 먹는다.


텃밭과 화단, 그리고 화분에 호복이 물을 주다. 또 풀을 매다. 싱싱한 상추와 배추가 느실느실 춤을 춘다. 차렷 자세의 고추나무 대열이 정연하다. 연보라, 빨강, 연분홍 등 온갖 빛깔의 꽃들이 활짝 웃고 있다. 손자 A, K, 한슬이를 부르고 있다. 특히 한슬이를 몹시 기다리는 것 같다.


서예 학원에서 꽤 많은 시간 습작에 열중했다. 원장은 학교(원광대 서예문화대학원)에 가고 없다.


2005년 5월 19일



할머니는 식물의 신이다. 언제나 텃밭에 온갖 꽃, 나무, 밭 작물을 가꿨다. 할머니집 마당에는 없는 게 없었다. 특히 내 생일이 있는 5월에 가면 장미, 앵두, 철쭉꽃이 다 피었다. 먹을 것도 많았다. 할머니는 직접 기른 고추로 가루를 내서 직접 기른 배추와 무로 김장을 담갔고, 직접 기른 파로 파김치를 만들어 주고, 직접 기른 부추를 뜯어오라고 해서 부추전을 만들어 줬다.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세 손자 중에서 꽃과 식물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집에서 자라는 모든 꽃과 나무와 작물의 이름을 알았다. 쑥을 캐는 법, 냉이와 잡초를 구별하는 법도 할머니가 마당에서 가르쳐줬다. 지금도 할머니는 기르던 꽃이 피면 나에게 사진을 보낸다. 할아버지도 마당의 꽃이 특히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는 부분에서 웃었다.


나에게 텃밭은 할머니의 공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바빴다. 산으로 바다로 나물이나 조개를 캐러 다니시고, 친구도 많으시고, 정년까지 일하셔서 할 일도 많으셨다. 할머니가 없는 날에는 할아버지가 텃밭을 돌봤다는 걸, 이 일기에서 새삼스럽게 알았다.


마당과 텃밭이 있던 할머니집은 이제 없다. 재개발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일하러 오신 분들한테 나눠 주곤 했다. 지금은 엄마집 마당에 온실을 만들어서 할머니의 화분을 전부 옮겼다. 밭일도 꽃을 기르는 일도 중노동인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매일의 중노동을 사랑했을까? 끊임없이 생명을 길러내 온 할머니. 느실느실 춤을 추고, 대열이 정연하고, 활짝 웃고 있는 연보라, 빨강, 연분홍을 기록해 온 할아버지. 모두가 나를 몹시 기다려 준 5월.


2021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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