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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홍작가 Sep 18. 2023

나는 야식 덕후였습니다



은퇴 전 이삼십 대 내내 주 100시간씩은 연구하고 강의하며 바쁘게 보내느라 살림이나 요리를 직접 하지 않고 지냈다. 살림은 주 1회씩 방문하시는 도우미 분께 맡기고 음식은 반찬가게나 배달 음식을 주로 이용했다. 저녁을 먹었는데도 한밤중에 야식을 더 시켜서 재미 삼아 먹는 날도 많았다.     


족발이나 보쌈을 시키면 삼사만 원은 나오고 치킨도 맥주와 함께 먹으면 이만 원이 훌쩍 넘는다. 한 달에 배달 음식을 시키느라 쓴 돈이 평균 15회 총 사오십만 원이 넘는다. 이 돈이면 어휴, 식재료 사다가 직접 요리해 먹는 요즘 생활비 기준으로 두 달 치 식비는 족히 된다.

      

저렇게 사먹는 게 썩 잘하는 일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입에 들어오는 만족감이 좋아서 절제를 안 했다. 그런데 파이어 정신으로 무장하면서부터는 야식을 참는 절제력이 훅- 늘었다.

    

처음에는 돈을 아끼려는 목적이었다. 은퇴하고 시간도 많으니 요리도 좀 해보자는 동기도 있었다. 싸지만 싱싱한 식재료를 사다가 간단하지만 건강한 조리법으로 요리를 해 먹었다. 점점 요리가 재밌어지기도 하고 몸이 점점 건강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다 아주 가끔 배달음식을 시킬 때가 있었는데, 전에는 너무 익숙하던 그 음식이 불편했다. 첫인상부터 에러. '이 많은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 어쩔 건가.' 뚜껑 열고도 에러. '기름지고 뜨거운 음식이 플라스틱에 닿아서 이렇게 먹다간 건강도 팍 상할 텐데.' 먹다가도 에러. 직접 요리를 해 보니까 알게 되는 진실, ‘와, 이 정도로 짜고 달려면 소금 조미료 설탕을 얼마나 때려넣은 거냐?’   

  

이렇게 여러 이유로 거북해지면서 자연히 배달음식을 끊고 외식도 줄이게 됐다.  

   

배달 앱도 지웠다. 치킨 광고나 족발 먹는 TV 방송 좀 봤다고 거짓 식욕이 부추겨지고, 그걸 앱 터치 몇 번이면 곧바로 소비할 수 있었던 이 자본주의 신기술 사회의 편리함이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빠른주문-배달-과식-낭비-건강 해침-오염’의 너무도 쉬운 연결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만 배달 앱을 지우는 게 아니라 이런 생각으로도 지워버리게 되더라.   

  

지금도 유튜브나 TV에선 야밤 치맥 정도는 귀여운 일이라는 듯 오락거리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직 채식주의자까지 되진 못했지만 과도한 육식 산업의 여러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육식을 줄여보려고도 하는 중이다.



합리성과 절제력은 훈련되고 더 강해지는 성질이 있는가 보다. 내 노력은 야식 하나 끊어낸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점점 확장됐다.

    

혼자 살기 시작한 서른부터 삼십 대 내내 옷장이 방 하나를 다 차지했다. 다 합쳐서 길이를 재면 한 8미터쯤 됐다. 맞다, 과했다. 8미터 옷장 중에 당장 입는 옷은 사실 2미터쯤 될 뿐이었다. 그런데도 스타일이 예쁜 옷, 재질 좋고 편한 옷, 몰디브 한달살이 때 입을 옷, 살 조금 빠지면 입을 옷, 살 크게 빠지면 입을 옷 등등 여러 이유를 대며 주문하고 받아서 걸어뒀다.  

   

비싼 건 안 좋아하는 성격 덕에 질 좋고 가격 싼 옷 위주였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을 한 거다. '질 좋고 가격 싼 옷만 잘 골라 사는 나는 합리적 소비자다'라고 말이다. 사실 8미터면 일단 합리적일 수 없는 거잖아!  

   

그놈의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한 보상이야' 핑계를 대며 대충 생각하고 지낸 거다. 워커홀릭으로 아주 바쁘게 살던 때였는데, 새벽에 가끔씩 인터넷 쇼핑을 하며 두세 시간씩 보내는 게 스트레스 해소되는 일종의 놀이였던 것 같다. 지금은 많이 반성한다.  

   

돈을 더 아끼기 위해 이런 습관을 고치자고 생각하던 중에 옷에 관련한 환경 문제를 다룬 다큐들을 보게 됐다. 그 덕에 생각이 더 크게 바뀔 수 있었다. 옷감과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유통되면서, 빨래한 물이 버려지면서 만들어지는 쓰레기와 오염물질이 엄청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돼서다.   

   

청바지 하나 만드는 과정에서 물이 몇천 리터씩 드는데, 유독성 염료를 쓰는 데다 워싱을 수십 번 하느라 심각한 수질오염을 시키고 있었다. 친환경적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정보를 접하고 나니 8미터짜리 옷장이 더 이상 '소확행의 뿌듯한 진열장'으로만 보이지가 않더라. 가득 진열된 옷들의 탄소 발자국을 따져보면서, 내가 돈을 버려가며 환경까지 심각하게 망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웠다.

     

그 뒤로는 꼭 필요한 옷이 아니면 사지 않고 지낸다. 은퇴 뒤 제주도로 이사할 때도, 캐나다로 이사할 때도 꼭 필요한 옷 위주로 남기면서 계속 옷 짐을 줄였다. 이젠 2미터 옷장도 헐렁하다.


          

만일 내 절약의 이유가 단지 돈 아끼기 뿐이었다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습관을 바꾸지는 못했을 거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 즐거움을 억지로 참자는 식이었다면, 절약하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빠져나갈 핑계를 만들면서 대충 실천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심심풀이이자 스트레스 해소용이던 야식과 옷 쇼핑을 단번에 끊고도 나는 즐거웠다. 돈을 아낀 것만이 아니라 내 건강에도, 환경에도 잘한 것이라는 마음에 절약이 기쁘고 뿌듯했기 때문이다.   

  

절약이 마음을 궁핍하게 만든다면 오래 이어나가기 힘들다, 반대로 절약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면 성공하기 쉽다. 이런 절약 경험이 적립되다 보면 내가 생각보다 강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자신감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상황에서 이렇게 건전하고 건설적인 시각을 펼칠 수 있는 동기를 얻을 수도 있다. 오우, 절약! 너 이렇게 멋진 애였어?


        

은퇴 후엔 기름지고 비싼 배달음식 대신 간단하지만 건강하게 직접 요리해 먹는 재미를 누린다



캐나다홍작가 인스타그램 링크 https://www.instagram.com/hongwriter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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