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또 이렇게 보내는군요

by 캐나다홍작가


은퇴 뒤에도 동네 축제나 친구들 파티, 여행 가는 날처럼 이벤트는 있지만 오늘처럼 소소하게 보내는 날들이 더 많다. 파이어를 준비하는 여러분의 은퇴 후 한가하고 평범한 하루를 예상해보면서 느긋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 느긋하게 경치 즐기며 공부하는 아침


캐나다 소도시의 여름, 오늘도 아침 8시쯤 눈을 떴다. 한 8~9시간 넘겨 푹 자면 이렇게 저절로 눈이 떠지는구나. 알람을 여러 개 맞춰놓고 5분씩 연장하기를 반복하며 시끄럽게 일어나던 서울의 아침과는 많이 다르다.


눈을 떴다고 곧바로 일어나 씻고 허겁지겁 먹고선 출근할 일은 없다. 침대에서 웹툰 보며 한두 시간 더 뒹굴뒹굴하다 일어나 커피 한 잔 만들어서 발코니로 나간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발코니에서 여러 경제 기사나 정보들을 조사했다. 증권 앱을 켜고 소량이나마 보유하고 있는 주식 관련 기사들도 읽는다. 유용한 정보들을 찾고 정리하고 공부하는 게 20년 넘은 습관이자 취미이다. 이 습관은 인생 내내 많은 도움이 되어줬기에 은퇴 후에도 여전히 첫 일과로 챙기고 있다.


캐나다 소도시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이는 아침 뷰


- 한가하게 밥 먹고 취미생활 즐기는 오후


이렇게 여유롭게 아침 시간을 보낸 뒤에 보통 11~12시쯤 첫끼 브런치를 만들어 먹는다. 밥, 국, 반찬 여러 개를 차려 놓고 먹는 한식은 갖춰 만들기가 번거로워서 캐나다 이민 후에는 해 먹는 날이 거의 없다. 한국살이 40년간 실컷 먹기도 했고.

요즘은 건강한 재료로 10분간 짧게 만들어서 1시간 동안 천천히 먹는 식사를 즐기고 있다. 오늘은 채소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차와 과일 후식까지 한 쟁반에 담아 다시 발코니로 나간다.

쫑쫑거리는 새소리도 귀엽고 강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도 예쁘다. 바람결에 풀향기 꽃향기 흙냄새 풍기는 것도 좋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밥 먹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던가.

캐나다 아파트는 대부분 발코니가 있고 다운타운만 아니면 건물 밀도도 낮다. 그 덕에 굳이 어딜 나가지 않고 집에서도 예쁜 풍경을 보며 기분을 낼 수 있어서 좋다. 한국에 비해 꽤 비싼 월세를 굳이 감당하는 이유다.

오늘 브런치, 10분 안에 만들고 1시간 동안 천천히 먹기 실천 중


먹고 나서는 곧바로 설거지까지 끝낸다. 서울에 서 주 100시간씩 일하던 때는 내가 살림을 할 시간이 없어서 도우미 분이 오실 때까지 며칠간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쌓아뒀다. 녹색 곰팡이가 핀 적도 여러 번 있었... 그런데 지금은 시간도 많고 세제도 덜 쓸 겸 곧바로 닦는 편이다.

조금 쉬다가 2시에는 줌(ZOOM)으로 영어 수업을 들었다. 동네 이민자센터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캐나다는 이민자들에게 공부든 취미 활동이든 무료로 하게 돕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실컷 활용하고 있다.


오늘은 70대 여자 선생님의 캐나다살이 팁 강의였다. 칠팔십 대 노인 봉사자가 재능기부를 하는 현장을 보는 것은 언제든 감격적이다. 나도 나중에 춤 수업으로 재능기부를 하며 다닐 생각이라 남 일 같지 않고 관심이 더 간다.


오후에는 동네 이민자 예술가 여성 모임이 있다. 이것도 이민자센터가 주최한 모임이다. 여기서 동네 공원에 걸 벽화 그리기 재능기부 중이다. 다음 달에는 동네 전시회에 내 그림도 한 점 걸게 됐다.

그림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도 나처럼 본국에선 대도시 워커홀릭 생활을 하다가 이민 와서는 소박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파이어족들이 몇 더 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곳을 찾아 와서 만난 셈이다. 미국이나 호주가 아니라 캐나다를 찾는 사람들, 특히 소박하고 은퇴자 많은 소도시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취향이 비슷할 가능성이 꽤 높다.


그림 봉사 모임의 친구들, 맨 오른쪽이 작가

이렇게 지내며 느낀 바, 은퇴 뒤 무료하지 않고 재미있게 잘 지내려면 취미, 특기 활동이 꽤 중요한 것 같다. 여러 문화 활동이나 봉사 활동 등을 하며 사회적 교류를 이어가야 은퇴 뒤에도 고립감,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지내기 쉽다.

그림 모임 끝나고 오는 길에 동네 바닷가를 드라이브했다. 바람은 살랑대고 좋은 음악도 틀어놨겠다, 그냥 집으로 오기가 아쉬웠다.


면허를 서른 중반에야 땄다. 그전까진 너무 바쁘기도 했고 일찍 차를 사면 돈 낭비가 클까 봐 미루고 미루다가 경제기반이 좀 잡히고 나서 따게 됐다. 늦게 면허를 따고 차를 샀기 때문인지 아직은 운전이 너~무도 재밌고 신나는 일이다.

'운전할 줄 알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권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 맞았다. 내 기분에 맞춰 내 필요에 맞춰 어디든 언제든 갈 수 있는 자유! 이래서 여성인권 똥국가에서는 여자들 운전면허 따는 걸 그리 억압했던 거였구나. 자유국가에 태여서도 이 맛을 이리 늦게 알게 되다니, 이제라도 슝슝 많이 다녀야겠다.


- 임대사업 일 챙기고 글 쓰며 보내는 저녁

드라이브 하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치우니 해가 슬슬 진다. 발코니에서 노을 구경을 실컷 했다.

캐나다 동부 여름은 9시가 넘어서 해가 진다. 여기선 보통 4시에들 퇴근하기 때문에 긴 오후와 저녁에 취미생활 하고 장 봐서 가족들과 요리해 먹는 게 한국보다 수월한 일이다. 워라밸(Walk & Life balance)하겠다고 개인이 용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는 사회구조인 셈. 이렇게 행복하기가 더 쉬운 나라가 있더라.

일정이 쓰인 달력을 보니 한국 상가 월세의 부가세 신고 기간이다. 홈텍스 사이트에 들어가 클릭 몇 번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은퇴 전엔 세무사에게 다 맡기던 일인데 지금은 시간도 많고 비용도 줄일 겸 직접 처리하고 있다.

티비 보며 스트레칭 좀 하고 쉬다가 밤에는 지금처럼 잠깐 글쓰기 중이다. 나중에 다듬기를 글 쓰는 시간보다 10배는 더 오래 하겠지만 내겐 꽤 즐거운 시간들이다. 글쓰기가 좋은 덕에 이민온 해부터 일 년에 한 권씩 책도 냈다. 이민에 대한 책과 비혼주의 에세이인데, 작가로는 이력 없는 초보라서 자비출판으로 돈을 꽤 썼지만 내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손익 안 따지고 열정적이게 됐다.

세 번째 책은 지금처럼 카카오 브런치에 쓰는 중이다. 이런 걸 진작 알았더라면 첫책부터 활용했을텐데... 브런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쓰고 다듬는 매력이 있어 좋다.


- 계획들 정리하다 잠들기

자기 전엔 이것저것 할 일이나 계획들을 다시 점검하다가 잠드는 게 습관이다.

서울에서는 일과 관련된 계획들이 너무 많다 보니 이런 생각들로 몇 시간씩을 보내다 숙면이 안 되던 때도 많았다. 생각을 놓치기 싫어서 중간중간 벌떡 일어나 정리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런데 은퇴 뒤에는 그렇게 빡빡하고 철저하게 굴 필요까진 없어서 삼십 분 내로는 잠에 빠지는 것 같다.

요즘은 열한 시쯤 잠드는 편인데 그렇다고 늘 규칙적이지는 않다. 빗소리 좋은 날이면 커튼을 열어놓고 창문에 비 부딪히는 소리를 한참 듣다 새벽에 잠들 때도 있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은 날은 그냥 그렇게 한다. 다음 날 좀 늦게 일어난다고 해서 내 일, 남의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마음이 더 원하는 걸 택하게 된다. 영어 수업을 빠지고 드라이브가는 날도 있고, 먹고 숨쉬는 것 말곤 아무 것도 안 하는 날도 있다.

이렇게 느슨한 루틴조차 안 지키고 기분 내키는 대로 지내는 때도 있지만, 근데 뭐 좀 어떤가. 이젠 굳이 빠릿빠릿하고 규칙적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게 바로 은퇴 전 할 일과 은퇴 뒤 할 일 간의 차이인 것 같다. 이젠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속도로 즐기면 되는 거니까^^



소박한 파이어족 조기 은퇴 6년 차, 요즘은 이렇게 지낸다.




캐나다홍작가 인스타그램 링크 https://www.instagram.com/hongwriter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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