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좋아할 것
대학교 글쓰기 시간에 가장 먼저 받았던 과제는 여섯 가지 주요 주제를 가지고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써내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재밌으면서도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과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는 주문이었다. 지금이야 좋아하는 것도 많고 내가 그것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떠벌릴 만큼 뻔뻔해지기도 했지만 그때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고 쑥스럼을 많이 타서 나의 취향에 당당하지도 못했다. 그 수업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감을 각자 생각하고 조를 짜서 토론을 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고른 소재를 어떻게 다섯 단락 글쓰기의 구조 안에서 펼쳐나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 수업은 4인 1조 체제였는데 우리 조원 중 한 명은 일찌감치 수업을 포기해서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질 않고 나머지 한 명은 왜인지 강의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어 사실상의 2인 1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조에 비해 인원이 적은 탓에 각자의 주제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의견을 제공하는 것에도 한계가 느껴졌다. 다행히 나머지 한 명과 열심히 머리를 맞대보았고 동료가 적다는 사실은 오히려 서로의 생각을 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고른 글감은 '카페'였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꽤 많이 웃긴 선택이다. 지금의 나는 커피 없이 못 사는 카페인 중독자지만 카페라는 공간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거기에 글쓰기 시간에 글감으로 써먹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카페를 그렇게나 열렬히 사랑해 왔는지는, 글쎄. 그렇게나 좋아해 왔다면 근방에 커피맛도 있고 보기에도 좋은 카페가 얼마나 많은지 꿰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멋도 있고 맛도 있는 좋은 카페를 고르는 안목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건 지금도 그러하다. 글쓰기 과제로 카페 예찬론을 썼던 바로 그 시기에는 어느 후배와 점심을 먹고 학교 정문 근처의 한 카페에 갔다. 그곳은 보통 시장통 같은 분위기인 곳이고 시간 관계상 커피를 앉아서 마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곳의 카페모카를 좋아했고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는데 주변이 무척이나 시끄러웠고, 흡음재가 아니었던 매장의 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정없이 서로에게 반사해댔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같이 간 후배는 '저는 여기에 두 번 올 것 같지는 않아요.'라고 했다. 커피를 좋아하고 사실 커피보다는 카페에 머무르는 시간을 좋아한다,라고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써냈던 나는 조금 민망했다. 어쩐지 내 별로인 취향을 들킨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물한 살의 나는 "난 커피가 좋아. 사실 커피보단 카페라는 공간이 좋지. 안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도 좋고 카페를 나선 뒤에도 얼마간 나를 따라다니는 커피 향이 너무 좋아."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도 좋은지 나쁜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수많은 카페들을 거치며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한 달에 적어도 이십여 만원을 커피 마시는데 쓰던 나는 독립을 한 뒤에 카페를 거의 찾지 않게 되었다. 이쯤 되어서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던 작은 진실은 나에게 있어 카페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했던 시기에 꼭 필요했던 자기만의 방이었다는 것이다. 그 방은 들어갈 때마다 돈도 내야 하고 잘 모르는 타인들과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점에서 남들 보기에 좋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 그렇게까지 맛있을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가 너무 밉고 혼자서는 괜히 서러운 어느 날 길에서 눈물 콧물 짜 내며 온 얼굴로 울면서도 도무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도망치듯 동네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그곳은 커피가 맛이 없고 인테리어가 지저분하지만 그 근방에서 유일한 24시간 운영 매장인데다 흡연실까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카페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펜과 노트를 하나 샀다. 이곳에 앉아서 말로는 표현할 길도, 표현할 곳도 없는 이 마음을 다 털어놓으리라. 손가락들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노트의 마지막 장이 보일 때까지 내 마음을 전부 다 쏟아붓고 나가리라. 테이블 바로 옆 시끄러운 커피 그라인더 소리도 아무래도 좋았다. 짜내고 짜 내서 한 방울의 마음도 남아 있지 않다고 느껴지기까지는 열 세 페이지가 걸렸다. 약 세 시간 반이 흐른 뒤였다. 혼잡스런 공간은 그 순간만큼은 나의 솔직한 모습을 가장 먼저 만나준 소중한 곳이었다.
지금은 이전보다는 다양한 이유로 카페에 가기도 하고, 또 그 때에 비해 카페에 덜 가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이유를 가지고 어느 카페에 방문했다. 작년에 비스킷과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들러 한 번 갔던 카페였다. 정작 방문했을 때는 이미 여름이라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가 없었지만 대신 리치 향이 나는 다른 원두를 한 봉지 사 와서 초가을까지 맛있게 내려 마셨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다시 방문한 것은 겨울을 맞아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에 도전해보리라 하는 마음이었다. 작년에 갔던 그 카페에서의 좋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또 이제 당분간 커피를 한 잔씩 사 마시는 대신 집에서 직접 내려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원두를 좀 사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차였다. 하지만 약 반년 만에 다시 찾은 자리에는 다른 카페가 있었다.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잘 알아보지도 않고 갔더니 이런 낭패를 본다. 인스타그램을 확인해보니 가려던 카페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지 한참 후였다. 돌아 돌아 다시 제대로 된 곳으로 찾아간 카페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즘 말로 조금 더 '힙'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공간에 비해 사람이 많다 싶어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맛있는 원두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엔 모두 혼자 온 사람들뿐이었다. 사람이 하나가 늘어서 신경이 쓰였는지 내가 들어가자 문가에 혼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바로 자리를 비웠다. 각 자리는 한 사람 혹은 최대 두 사람이 앉기에 적당해 보였다. 읽을 것을 들고 갔는데 놓고 보기에 테이블은 좁았고 사람들은 조용하고 재즈만이 꽉 차게 흘렀다. 커피는 물론 굉장히 맛있었다. 읽으려던 글도 전부 다 읽었고 바라던대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이 잔뜩 생겨 좋았다. 나오는 길에 원두도 잊지 않고 구매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종합적으로 무척 좋은 경험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어제 사 온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상큼하고 짙은 과일향이 가득 입안을 맴돌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렇게 어제의 좋았던 경험을 오늘 아침에까지 주욱 하고 늘일 수 있다.
카페에 가서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참 좋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교수님이 내 글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짜임새가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점수를 깎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전과 같은 목적으로 카페에 가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계속해서 새로 생겨난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카라멜 마끼아또에서 아메리카노 샷 추가로 커 가면서(감히 이것을 '커 간다'라고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냈던 이곳저곳에서의 시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마치 나 자신에 대한 퍼즐을 한 조각씩 찾아내야 하는 미션을 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이름 모를 많은 카페들을 전전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여러 장소들에서 나의 일부분을 조각조각 찾아내서 짜 맞추던 시간들은 꾹꾹 잘도 지나갔다. 예전의 나는 멋진 곳에 가서 감미로운 것을 들이키면 내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곳들을 골라낼 안목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대신 조금 덜 멋진 곳에 가더라도 충분히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고 품을 내어줄 수 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우연히 멋진 곳에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충분히 즐기면 그만이다. 그건 어떤 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