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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May 24. 2023

방구석 호기심

책을 주워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분리수거를 하려 재활용품이 잔뜩 들어간 사과박스를 양손 가득 들고 내려갔다. 분리수거장에는 책을 버리는 박스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평소에 늘 책을 가까이(만) 하고, 책을 많이 읽고(싶어하고), 책을 사다가 책꽂이에 쟁여두(고 몇 년을 썩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그 책 박스에 꼭 한번씩 눈도장을 찍고 왔다. 혹시 누군가가 재밌는 책을 버렸을 수도 있잖아 하면서. 그 박스에는 거의 언제나 늘 다 쓴 수험서, 주식이나 코인 투자법이 적힌 경제서적, 대학 전공교재 등이 버려진다. 그 박스 안을 들여다볼 때면 부디 이 수험서의 주인은 준비하던 시험을 잘 치르고 합격했기를, 이 투자책의 주인은 수완이 좋았기를, 전공교재의 주인은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은 평소에 잘 눈에 띄지 않는 종류의 책이 보였다. “방구석 미술관” 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의 책이었다. 방구석OOO라는 제목의 인문학 강의나 티비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같고, 그 시절은 꽤나 오래 전에 지나갔던 것도 같고. 그럼 이 책의 (전)주인은 인문학에 대한 얕고 넓은 지식을 좋아하던 이였는데 이 책을 통해 볼 재미는 다 봤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건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큰 고민은 하지 않고 집어들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손을 뻗는 동안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그랬는데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시간축이 달라서 모두에게 사실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가지 않는다고. 그 순간에 내게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이런 쓰레기장에 버려진 책을 집에 가져가는건 쓰레기를 주워가는 것 아닌가? 이 책의 제목이 식상하다고 생각했잖아? 너는 양산형 인문학에 대한 혐오를 가진 거만한 사람이잖아? 저 책에 유해물질이 묻어 있으면 어떡해? 가져가봤자 읽겠어? 그런데 5월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 마침 빠르게 몰아 읽을 책이 한 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 그러고보니 그림책을 나는 좋아하지. 






버려진 “방구석 미술관”을 좋아할 이유보다 싫어할 이유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집어서 들고 왔다. 열 가지의 싫은 이유를 이겨먹은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읽히지 않은 책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동경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말이다, 사실 읽고 나서보다는 읽기 전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학교 다니던 때에 독서는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라고 배웠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세계와, 그리고 나 자신과 계속해서 문답을 나누게 된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과 나눈 대화는 내 세계로 초대되고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읽히지 않은 책은 아직 나와 대화를 나누기 전의 모르는 사람인 셈이다. 초면인데 나는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 호기심은 방금 생긴 것일수도 있고 어쩌면 한참 전부터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수도 있다. 






이건 꼭 마음에 드는 이성과 가까워지는 과정의 가장 첫 페이지를 읽을지 말지 고민하며 책 모서리를 손으로 접어 누르고 구기고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잘 모르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는 퍽 매력적이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는 상관이 없다.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르는게 차라리 더 낫다. 내 마음대로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상상해볼 수 있으니까. 언제 읽을지 기약 없는 책을 자꾸만 책꽂이에 쌓아두는 것은 이 설렘과 긴장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집어온 “방구석 미술관”은 19년 1월 1일에 전 주인에게 판매되어 23년 5월 24일에 버려졌다. 4년하고 5개월동안 이 책은 누구에게 어떤 설렘을 주었을까? 나도 여기에 새로운 설렘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충분히 설레 하려면 얼마나 쟁여두다가 읽으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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